AI칩 공급망 특정 기업 쏠림 심화…"한국 제조업 협상력 더 약해질 수도"
[메가경제=박제성 기자]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거래 우위를 이용해 사실상 ‘강매성 장기 구매 계약’을 체결하도록 압박했다는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 판단이 법원에서도 다시 한번 인정됐다.
서울고등법원 행정6-1부(재판장 김민기)는 13일 원고 측인 브로드컴이 공정위를 상대로 제기한 시정명령 및 과징금 납부 명령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공정위가 2023년 브로드컴에 부과한 186억원 규모 과징금과 시정명령은 그대로 유지됐다.
![]() |
| ▲[사진=챗GPT4] |
삼성전자는 당시에도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경쟁이 치열했던 핵심 부품 역할을 하는 통신칩 공급망 불안 속에서 불리한 계약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이 재차 드러난 이슈에 속한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브로드컴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내 ‘슈퍼 갑(甲) 공급기업’으로서 지배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고 평가한다.
이번 판결은 단순한 공정거래 사건을 넘어 반도체를 포함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공급망 우위를 내세워 완성품 제조업체에 얼마나 강한 협상력을 행사하는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파장이 적지 않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특히 AI 반도체와 모바일 AP(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무선통신칩 시장이 특정 기업 중심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국내 제조 기업들의 공급망 다변화 전략과 핵심 부품 내재화 필요성도 다시 부각되는 상황이다.
◆ “경쟁사 썼다며 공급 압박"…삼성 겨눈 브로드컴 CEO 이메일, 법정서 드러나
해당 사건은 공정위가 2023년 9월 브로드컴의 거래 행위를 공정위가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판단하면서 본격화됐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브로드컴은 2019년 말부터 삼성전자에 장기 공급계약 체결을 강하게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사실상 계약 체결을 압박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기기 생산에 필요한 핵심 부품 일부를 브로드컴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일부 부품에 대해 경쟁사 제품을 채택하자 브로드컴은 강하게 반발했었다.
이 과정에서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는 당시 삼성전자 대표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내 “내가 증오하는 경쟁사(my hated competitor)와 계약한 것에 실망했다”는 취지의 표현까지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브로드컴은 단순 항의 수준을 넘어 실제 공급망 압박에 나섰다는 게 공정위 판단이다.
◆ “부품 안 줄 수도 있다"…브로드컴의 압박, 법원도 '갑질' 인정
공정위는 2020년 2월부터 삼성전자의 구매 주문 접수를 중단하거나 지연했고, 일부 부품 선적과 기술 지원까지 보류한 것으로 조사했다.
모바일 제조업 특성상 핵심 통신칩과 부품 공급이 차질을 빚을 경우 제품 출시 일정과 생산 계획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던 상황이다.
결국 삼성전자는 약 한 달 만에 브로드컴과 장기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조건에는 2021년부터 3년간 매년 최소 7억6000만 달러 규모의 브로드컴 부품을 구매해야 하며, 이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차액을 보전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는 이 계약이 정상적인 협상 결과라기보다 사실상 공급 중단 압박 속에서 체결된 불공정 계약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실제 삼성전자는 이후 출시된 ‘갤럭시 S21’ 일부 모델에 기존 계획과 달리 브로드컴 부품을 탑재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부담한 전체 규모가 약 8억달러 수준에 달한 것으로 추산한다.
브로드컴 측은 공정위 처분 직후인 2023년 11월 행정 소송을 제기해 강하게 반발했다.
브로드컴은 재판 과정에서 “삼성전자에 어떠한 불이익도 제공하지 않았고 계약 역시 정상적인 상거래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특성상 장기 공급계약은 업계에서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방식이라는 논리도 내세웠다.
하지만 법원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브로드컴의 행위가 삼성전자에 실질적 불이익을 초래했다고 봤다.
단순한 거래 협상을 넘어 공급 중단 가능성을 이용해 상대방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 삼성도 흔든 브로드컴 판결, 글로벌 공급망 '슈퍼갑' 민낯 드러나
재판부는 공정위가 해당 사안을 ‘매우 중대한 위반 행위’로 판단해 매출액의 2% 수준 과징금을 부과한 조치 역시 재량권 남용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삼성전자 측은 이번 판결과 관련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회사 관계자는 “소송과 관련된 법적 사안인 만큼 계약 관련 세부 내용에 대해 별도로 말씀드리기 어렵다”며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을 통해 입장이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당 사건은 이미 5년 이상 지난 사안이어서 당시 어떤 의사결정이 있었는지 현재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건이 글로벌 공급망 구조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평가한다.
스마트폰·AI·서버 시장이 고도화되면서 특정 반도체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있고, 일부 핵심 칩은 사실상 대체 공급처 확보가 쉽지 않은 구조이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중국 간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핵심 반도체 공급망이 특정 기업과 국가 중심으로 재편될 경우 국내 제조업체들의 협상력이 더욱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번 판결을 계기로 국내 기업들의 공급망 다변화 전략과 핵심 부품 자체 기술 확보 움직임이 더욱 빨라질 가능성이 있다”며 “단순히 가격 경쟁력 확보를 넘어 특정 공급업체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향후 글로벌 제조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떠오를 수 있다”고 전했다.
[ⓒ 메가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