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100대·하드 270여대 교체에도 처벌 어려워…하도급법 제도 공백 재부상
[메가경제=박제성 기자] 공정거래위원회의 하도급법 위반 직권조사를 앞두고 대규모로 내부 자료를 삭제·폐기한 현대중공업(현 HD현대중공업) 임직원들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뒤 항소심 판결에서 대법원이 파기 조치했다.
하도급법의 양벌 규정(직원과 회사 동시 처벌 규정)상 해당 임직원 스스로가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면 자료를 없앤 행위는 회사를 보호하기 위해 숨긴 것이 아니라 자기 처벌을 피하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 적용된 것이다.
![]() |
| ▲챗GPT4가 구현한 대법원과 HD현대중공업 조선소와의 합성된 이미지[그래픽=챗GPT] |
앞서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재판장 오석준 대법관)는 증거인멸교사 등 혐의로 기소된 현대중공업 협력사 지원 담당 상무보급 임원 A씨와 협력사지원 팀장 B씨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법적으로는 ‘남의 범죄 증거를 없앤 것’이 아니라 ‘자기 사건과 관련된 행위’에 해당할 수 있어 형사 처벌을 하기는 어렵다는 취지에서 이런 결정을 대법원이 내린 것으로 업계는 해석한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이번 판결에 대해 일각에서는 특정 기업이 조직적으로 수사를 방해했는데도 법원이 이를 너무 느슨하게 판단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아울러 하도급법에는 이런 수사를 방해 하는 행위를 직접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없어 법의 빈틈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지적도 함께 제기된다.
◆ 공정위 조사 앞두고 PC·하드 대거 교체…검찰 '증거인멸'
앞서 2018년 현대중공업 협력사 지원 담당 상무보급 임원 A씨와 협력사지원팀장 B씨는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의 하도급법 위반 직권조사와 고용노동부의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위반 수사 가능성에 대비해 회사 내부 자료를 조직적으로 정리·삭제한 혐의를 받았다.
당시 A씨의 지시에 따라 협력사 지원 조직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자료 정리가 이뤄졌고 그 결과 업무용 PC 102대와 하드디스크 273대가 교체됐다.
이 과정에서 하도급 거래 구조, 협력업체 운영 내역, 파견 근로자 관련 자료 등이 대거 사라진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이를 공정위 고발로 이어질 수 있는 형사 사건의 증거를 없앤 행위로 보고 증거인멸 혐의를 적용했다.
◆ 1심 무죄 → 항소심 유죄…"장차 형사사건 될 수 있어"
재판 과정에서 법원의 판단은 엇갈렸다. 1심 법원은 “당시 공정위의 고발이 일반적이지 않았고, 검찰 수사까지 예상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판단을 뒤집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 2-2부는 "증거인멸죄에서 말하는 형사 사건에는 아직 수사가 개시되지 않았더라도 장차 형사사건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가 포함된다"며 피고인들이 하도급법 위반이 형사 처벌로 이어질 수 있음을 충분히 인식한 상태에서 조직적으로 증거를 삭제했다고 봤다.
이에 따라 항소심은 A씨에게 징역 1년, B씨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해 실형까지 언급했다.
◆ 대법원 "자기 사건이면 방어권"…판단 다시 뒤집혀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다시 달라졌다. 대법원은 하도급법의 양벌규정에 주목했다. 하도급법 위반의 경우 법인뿐 아니라 해당 행위를 한 임직원 개인도 함께 처벌될 수 있는데 이러한 구조상 피고인들이 회사와 별개로 ‘행위자’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면 해당 증거는 ‘타인의 형사 사건’이 아니라 ‘자기 형사사건’과 관련된 것일 수 있다"며 "자기 형사사건의 증거를 없앤 행위는 방어권 행사로서 원칙적으로 처벌 대상이 아니다"라며 기존 판례 법리를 재확인했다.
결국 항소심이 피고인들이 증거를 없앨 당시 스스로를 처벌 대상자로 인식했는지 해당 행위가 타인의 범죄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며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돌려보낸 것이다.
◆ "조직적 조사 무력화에 면죄부"…제도 공백 지적
이번 판결을 두고 법조계와 시민사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김남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생경제위원장은 "이번 사건의 본질은 개인의 방어권 행사가 아니라 공정위 조사를 조직적으로 무력화한 수사 방해 행위"라며 "대법원이 이를 방어 행위로 포장해 사실상 면죄부를 준 셈"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하도급법의 제도적 한계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김 위원장은 "공정거래법에는 조사 방해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있지만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는 조사 방해를 직접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며 "2018년 사건 이후에도 관련 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국회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번 판결로 향후 기업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자료를 삭제하거나 조사에 비협조적인 행위를 하더라도 형사 처벌이 쉽지 않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HD현대중공업 측은 이번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앞으로 유사한 사안이 발생하지 않도록 임직원 대상 컴플라이언스 교육과 내부 통제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 메가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