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전면보류 결사반대!" vs "우리가 청계천이다! 특화구역 지정하라!"
23일 오후 서울시청앞 광장에서는 서울시의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재개발 사업과 관련해 상반된 집회가 열렸다. 이날 같은 시간에 서울 광장은 반반으로 갈렸다.
‘보존’과 ‘개발’이란 대립된 의제는 구도심권의 재개발 사업을 앞두고 빠짐없이 등장하는 화두다. 재개발을 원하는 토지주나 건축주의 재산권과 세입자나 영세상인들의 주거권이 충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날 서울시청 앞 광장의 찬반 시위는 일반적인 집회와 그 내용과 촉발 원인이 달랐다. 이날 찬반 시위는 서울시가 을지면옥 등이 포함된 세운 재정비촉진지구 재개발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점화됐다.
이날 ‘세운 3구역 영세토지주’ 100여명은 서울시를 성토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서울시의 오락가락 행정에 분노해 이 자리에 나왔다”며 “시장 본인이 직접 다 둘러보고 결정한 일을 어떻게 하루 만에 뒤집을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들은 토지주와 입주상인이 현금 보상과 임시 영업공간 마련 등에 합의해 개발이 이미 시작된 상태인데, 박 시장이 일부 공구상인과 시민단체 말만 듣고 돌연 계획을 뒤집었다며 “기준도 원칙도 없이 이렇게 재산권을 마구잡이로 침해해도 되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토지주들의 집회장소와 근접한 서울광장 중앙부근에서는 시민운동가와 공구상인 30여명이 서울시의 결정에 찬성하는 집회를 열었다.
을지로 보존을 요구하는 이들은 토지주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회견을 했다. 서울시의 개발 재검토 결정을 지지하는 측은 ”재개발로 장인이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 안타깝다. 수십 년 동안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이곳 상가는 한 번 없애면 다시 만들 길이 없다“며 번복 결정을 지지했다.
![세운3 구역 내 생활유산인 을지면옥. 서울시는 2014년 수립한 정비사업 계획에 을지면옥, 양미옥 등 생활유산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판단해 이를 재검토해 반영할 계획을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https://megaeconomy.co.kr/news/data/20190129/p179565851570986_329.jpg)
서울시가 23일 발표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재검토안은 을지면옥을 비롯한 오래된 맛집과 공구업 등 도심산업은 보존하고, 진행이 더딘 정비구역은 개발을 중단하는 게 골자다.
서울시가 뒤늦게나마 문화·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산 보존에 나섰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10년 이상 추진된 재개발 사업의 방향을 또다시 트는 것을 두고 여론에 떠밀린 ‘뒷북 처방’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서울시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 올해 말까지 종합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2009년과 2014년에 이어 세 차례나 계획변경이 이루어지게 된다.
을지면옥이 있는 을지로와 청계천 일대는 오세훈 전 시장 재임 당시인 2006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재개발이 진행 중이다.
서울시는 애초 세운상가 좌우로 길게 이어진 지역을 8개 구역으로 나눠 전면 철거한 후 재개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박 시장 재임 후인 2014년 171개 중·소규모 구역으로 쪼개 점진적으로 정비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무분별한 재개발에 대한 우려를 고려한 조치였다.
을지면옥, 안성집 등 유명 맛집이 있는 3-2구역은 2017년 4월 사업시행인가를 받아 보상협의가 진행중이다. 보상이 완료되면 관리처분인가를 거쳐 철거가 이뤄진다.
을지면옥을 비롯한 일대 땅 소유주 14명은 재개발에 반발하며 2017년 7월 중구청을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사업시행인가 무효확인소송을 제기했다. 3구역 철거 본격화 과정에서 이런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비판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 진행 상황. [출처= 서울시 제공]](https://megaeconomy.co.kr/news/data/20190129/p179565851570986_405.png)
여기서 주목할 게 있다. 당초 이같은 논란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던 단계가 있었지만 행정이 그 조치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서울시가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을 전면 재검토 배경에는 을지면옥으로 불거진 비판여론이 큰 몫 했다. 하지만 행정상의 허점도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서울시가 2015년 을지면옥과 양미옥 등을 보존가치가 있는 생활유산으로 지정했던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재정비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2015년 수립한 ‘역사도심기본계획’에 생활유산을 정리해 반영했으나 법제화된 제도가 아니어서 정비사업 추진과정에서 일부가 철거 대상 되는 등 사각지대가 존재했다”고 해명했다.
세운 역사도심기본계획에는 세운상가 일대의 을지면옥, 양미옥, 조선옥, 우래옥, 을지다방 등 13곳이 보존가치가 있는 생활유산으로 지정됐으나 이후 사업시행인가와 보상 협의 과정에서 생활유산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서울시는 앞으로 을지면옥과 양미옥 등 유명 노포들은 보존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상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철거를 막는다는 게 기본 원칙이다. 구체적인 행정적 조치 방안으로는 철거를 위한 관리처분인가를 내주지 않거나 정비구역을 재조정해 해당 점포를 제외하는 방식이 거론되고 있다.
그간 도심 철거로 인한 부작용은 곳곳에서 확인됐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에 따르면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1-4-5 구역 상인 400여명 중 10% 이사이 폐업했다. 폐업하지 않은 상인들이 주변에서 새 점포를 찾다 보니 인근 지역에서는 수천만원의 권리금까지 생겨났다.
피맛골처럼 옛 정취를 담은 골목이 또다시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피맛골은 6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서울의 대표 선술집 골목으로 자리잡았으나 재개발 계획에 따라 2004년부터 철거됐다. 대신 그 자리에는 대형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섰다. 이후 유명 노포인 한일관, 청진옥, 청일집 등도 차례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도시재생과 재개발과정에서는 ‘보존’과 ‘개발’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이중적 가치를 조화시켜야 하는 난제를 안는 경우가 많다. 재산권 침해와 생활터전 보호, 그리고 관광자원의 보전이라는 가치가 충돌하곤 한다.
하지만 역사문화유산이나 보존 가치가 있는 생활유산들은 한번 파괴되면 원형 복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욱이 그곳에서 오래 뿌리박고 살던 사람들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삶의 터전을 잃고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면 더 큰 문제다.
박원순 시장은 "서울의 역사와 지역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노포(老鋪) 등 생활유산과 도심전통산업을 이어가고 있는 산업생태계를 최대한 보존하고 활성화한다는 것이 서울시의 기본방향"이라며 "이번 일을 계기로 시민 삶과 역사 속에 함께해온 소중한 생활유산들에 대해선 보존을 원칙으로 지켜나가겠다"고 말했다.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 발생 시 원만하게 조정하는 것도 행정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래야할 행정이 오락가락해 오히려 갈등을 부추긴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제부터라도 섬세하고 체계적인 도시개발정책이 될 수 있도록 제도와 운영절차를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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