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유턴에도 신뢰 회복 실패…영국 정치 대혼란 지속
다음주 후임 결정…초단기 총리교체에 차기 구도 불투명
리즈 트러스 총리가 자신이 내놓은 대규모 감세안이 시장의 혼란을 초래한 책임을 지고 취임 44일만에 초스피드 사임을 발표했다. 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가 됐다.
영국 가디언지 인터넷판에 따르면, 트러스 총리는 20일(현지시간) 오후 1시30분 총리 관저가 있는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찰스3세 국왕에게 사임한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그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의 자유를 활용할 저세금, 고성장 경제에 대한 비전”을 갖고 취임했지만 “현 상태로는 (여당인) 보수당에서 선출된 권한(mandate)를 수행할 수 없다고 인식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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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20일 목요일 런던의 다우닝가 10번지에 도착해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이날 사임했다. [AP 연합뉴스] |
이로써 지난 9월 6일 취임한 트러스 총리는 영국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재임한 총리라는 불명예 기록을 남기게 됐다. 직전 기록은 1827년 취임 119일 만에 사망한 조지 캐닝 총리다.
트러스 총리는 보수당의 상징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를 추앙하며 ‘제2의 철의 여인’을 꿈꿨으나 이념에 매몰돼 감세를 통한 성장을 부르짖다 벌써부터 리더십에 사망선고가 내려진 '좀비 총리' 로 불리는 처지가 됐다.
영국은 2016년 브렉시트 투표 이후 정치 경제 불안정이 지속되고 있다.
2016년 7월 사임한 캐머런 총리 이후 6년간 4명의 총리가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정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현재 보수당이 하원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트러스의 후임 새 당대표가 차기 총리가 된다. 당대표 선거는 다음 주에라도 실시될 전망이다.
트러스 총리는 “다음 주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 총리직에 머물겠다”고 말했다.그의 초스피드 실각은 새 내각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성급히 내놓은 50년만의 최대규모 감세안이 주된 요인이었다.
본격적인 겨울을 앞두고 에너지 가격 폭등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가운데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은커녕 혼란만 부추기고 리더가 떠나면서 영국 정치에 무력감만 더 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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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 사임까지와 총리 임기. [그래픽=연합뉴스] |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바통을 이어 지난 9월 6일 취임한 트러스 총리는 같은 달 23일 고물가 대책으로서 5년간 약 450억 파운드(약 72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했다.
사전 교감이나 재정 전망없이 불쑥 내놓은 대규모 미니예산(mini-budget)은 재원 마련조차 안 된 총체적 부실이라는 거센 비판과 함께 재정 악화 우려와 시장의 불신을 초래했다.
이에 파운드화가 달러 대비 역대 최저로 추락하고 국채 금리가 급등했다. 결국 대규모 감세안은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BOE)이 긴급 개입해야 할 정도로 영국 금융시장을 충격에 빠뜨려 국제사회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이례적으로 비판을 제기했다.
IMF는 감세정책이 인플레이션과 불평등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며 재고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지난 15일 오리건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영국 파운드화 가치 급락 등 금융시장 혼란을 가져온 트러스 총리의 감세정책을 대놓고 지적했다.
결국 제러미 헌트 신임 재무장관은 지난 17일 감세안의 거의 대부분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헌트 장관은 트러스 총리의 최측근으로 꼽혔던 쿼지 콰텡 전 재무부 장관이 경질된 뒤 지난 14일 임명된 터였다.
트러스 총리는 요동치는 시장과 국내외 비판에 이미 발표한 정책에서 유턴하기 시작해 부자 감세, 법인세율 동결 등을 차례로 뒤집고 정치적 동지인 콰텡 장관을 내쳤다. 하지만 이미 약화될 대로 약화된 구심력은 되돌릴 수 없었다.
영국 온라인 설문조사업체 유고브가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러스 지지율은 불과 7%까지 떨어졌다. 2011년 이후 총리로는 최저 지지율이었다.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무려 79%에 달했다.
트러스 총리가 내놓았던 감세정책의 한 축은 법인세율 인상을 동결하는 등 기업과 부유층을 의식한 내용이었다. 부유층이 받는 혜택은 곧 중산층과 저소득층에게도 돌아간다는 ‘낙수 효과’를 겨냥했으나 초스피드 사퇴로 인해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조기에 좌초되고 말았다.
차기 총리는 누가 될까? 트러스의 사임에 따라 보수당은 다음 주에 당수 선거를 치를 전망이다.
당헌대로라면 당 소속 하원의원이 후보자를 2명까지 압축한 뒤 일반당원 결선투표를 통해 승자를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 방식이라면 새 당수 선출까지 2개월 정도 걸릴 수 있다.
이에 이번에는 정치 공백기를 줄이기 위해 보수당 의원들만 투표하고 전체 당원 투표는 하지 않는다. 의원투표만으로 뽑힐 새 총리가 얼마나 큰 지도력을 발휘할지 의문이다.
후임자는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사실상 총리’로 불리던 제러미 헌트 재무장관과 마이클 고브 전 주택부 장관은 모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
트러스 총리와 경합했던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 케미 바데노크 국제통상부 장관, 페니 모돈트 원내대표, 그랜트 샵스 내무장관은 뛰어들 것으로 보인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복귀 가능성도 제기된다.
2019년 7월 집권 후 ‘브렉시트’를 이끌었던 존슨 전 총리는 코로나 방역기간 중 ‘파티게이트’에 이어 측근 임명을 둘러싼 ‘거짓말 의혹’까지 불거지자 지난 7월 집권 3년만에 사임했다. 그럼에도 그를 능가할 인물이 부재한 상태해서 당내 꾸준한 인기가 부각됐다.
[메가경제=류수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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