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초콜릿을 ‘달콤한 독’이라 부른다. 녹을 때의 감촉과 향미로 인해 초콜릿을 먹으면 행복감을 느낀다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순간의 행복감에 취해 자주 먹다 보면 건강은 엉망이 돼버린다.
요즘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대대적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 면제 움직임이 딱 그 짝이다. 각 지역이 앞다퉈 숙원 사업에 대한 예타 면제를 신청하고 여권은 합창하듯 그같은 행위를 부추기고 있다. 나랏돈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다. 그 결과물들이 애물단지로 남아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고, 그로 인해 국가 재정의 건강성이 훼손될 위험성은 안중에도 없다.
선별적 예타 면제도 모자라 아예 법규 자체를 뜯어고치려는 움직임마저 나타나고 있다. 그간 예타의 벽을 넘지 못해 묵혀져 있던 각 지역의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을 건설해주겠다는 게 그 목적이다. 최근 여당 대표는 예타 제도를 “합목적적으로” 고치기 위해 정부와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가재정법상 예타를 거쳐야 하는 총 사업비 규모를 현행 500억에서 1000억으로 바꾸는 것이 목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영산강 죽산보. 해체 의견이 제기된 곳 중 하나다. [사진 = 연합뉴스]](https://megaeconomy.co.kr/news/data/20190306/p179565870745418_834.jpg)
선봉에 선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예타 면제를 독려하고 있으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 보인다. 본격적으로 물꼬를 튼 계기는 신년 인사회에서 나온 문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당시 문 대통령은 광역단체별로 1건 정도씩 골라 예타를 면제할 뜻이 있음을 시사했다.
그 약속은 24일 다시 한번 구체화됐다. 이날 대전에 들른 문 대통령은 지역민들 앞에서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세종~청주 간 고속도로, 충남 석문 국가산업단지 인입철도, 충북선 철도 고속화 사업 등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그들 사업에 대한 예타 면제 여부가 곧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예타 면제를 약속한 셈이다. 이 정도면 오는 29일의 국무회의까지 남은 과정은 이를 확인하는 요식절차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 대통령의 거듭된 예타 면제 약속은 엄청난 국가 재정의 투입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지닌다. 문 대통령이 대전에서 귀띔했듯이 충청권에서 추진될 예타 면제 사업 규모만 4조원에 이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취합한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 신청된 예타 면제 사업의 전체 규모는 61조원 이상이다.
최소한의 타당성 검토도 없이 건설되는 SOC 시설은 건설비만 잡아먹는 게 아니다. 지어놓은 뒤에도 유지·보수를 위해 재정이 투입돼야 한다. 시설 유지로 인해 얻는 편익이 크다면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이나 전남 영암의 포뮬러1 경기장처럼 두고두고 논란거리 또는 골칫덩이로 남는 경우도 적지않다. 두 시설 모두 예타를 무시하고 밀어붙였다가 화를 부른 케이스다. 대형 SOC 시설의 경우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헐어 없애는데도 천문학적인 재정이 투입된다. 짓고 허무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환경 파괴도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그래서 생긴 것이 김대중 정부 시절 생긴 예타 제도다. 편익이 투입되는 돈보다 크다는 판단이 설 경우에 한해 대규모 SOC 건설 사업에 중앙정부가 재정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결실이 현행 국가재정법에 명시된 예타 관련 조항이다.
김대중 정부가 예타 제도를 도입한 배경엔 국가재정 건전성에 대한 아쉬움과 절실함이 있었다. 외환위기 와중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관계자 중엔 “정권을 인수하고 보니 나라 곳간이 텅 비어 있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을 정도로 당시 국가 재정은 엉망이었다. 집권 4년차에 이르러 힘겹게 국제통화기금(IMF)의 그늘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 김대중 정부는 이후에도 예타 제도를 충실히 지켜왔다. 재정 건전성의 중요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예타 제도의 탄생 과정을 되돌아볼 때 최근 문재인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움직임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지금도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명분 하에 예타를 면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관련법에 추가된 유보조항 덕분이다. 하지만 이것으론 양에 안 차니 법 규정까지 손질하겠다는 게 요즘 여권의 기류다. ‘총선용’ 시비는 차치하더라도, 김대중 정부 당시 예타 제도가 도입된 배경을 생각하면 실로 기가 찰 일이다.
대표필자 편집인 류수근
[ⓒ 메가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