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아픈 과거 직시·치유 함께 노력과 핵위협 함께 대응 의미”
위령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밖에 건립 후 1999년 공원 내로 옮겨져
한일정상회담, 서울 정상회담 후 2주만…양국 협력의 중요성 강조
히로시마 원폭 사망자 14만명 중 한국인 사망 2~3만명으로 추정 [메가경제=류수근 기자] 주요 7개국(G7)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오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했다.
이번 공동 참배에는 10명의 한국인 원폭 피새자들도 참석했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참배는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며 한일 양국 정상이 공동으로 참배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총리 중에는 오부치 게이조가 1999년에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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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하고 있다. [히로시마=연합뉴스] |
연합뉴스에 따르면,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기시다 총리와 유코 여사는 이날 오전 7시 35분께 위령비를 찾아 일렬로 서서 백합 꽃다발을 헌화하고 허리를 숙여 약 10초간 묵념하며 한국인 원폭 희생자를 추도했다.
윤 대통령은 이후에도 한 차례 더 목례했고, 원폭 피해자들에게도 인사했다.
양국 정상의 공동 참배 모습은 박남주 전 한국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권준오 현 한국원폭피해특위 위원장 등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이 뒤에 앉아 지켜봤다. 박 전 위원장은 피폭 당사자, 권 위원장은 피폭자 2세다.
양국 정상은 굳은 표정으로 참배에 임했고, 참배를 마친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의 안내를 받으며 차량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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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히로시마=연합뉴스] |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위령비 공동 참배 직후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 양자 정상회담을 열고 번영과 평화를 위한 양국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일 정상회담은 지난 7일 서울 회담 이후 2주 만이다.
양국 정상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합동 참배는 기시다 총리가 지난 7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당시 윤 대통령에게 제안하면서 이뤄졌다.
이도운 대변인은 이날 히로시마 한 호텔의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을 통해 이번 참배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겠다”고 강조했다.
우선 “두 정상이 한일 관계에 가슴 아픈 과거를 직시하고 치유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특히 두 정상의 참배에 우리 동포 희생자들이 함께 자리한 것이 그 의미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동북아 더 나아가 국제사회에서의 핵 위협에 두 정상 그리고 두 나라가 공동으로 동맹국인 미국과 함께 대응하겠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 대변인은 “기시다 총리는 한일 정상회담 모두 발언해서 오늘 참배가 양국 관계에 있어서도 그리고 세계평화의 관점에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며 “윤 대통령도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해 추모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평화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기시다 총리의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평가했다”고 덧붙였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 투하로 목숨을 잃은 한국인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시설이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1970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밖에 세워졌다가 1999년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선 매년 8월 5일 한국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린다.
이도운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며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히로시마에는 약 10만 명의 한국인이 군인‧군속‧징용공‧동원학도 ‧일반시민으로 살고 있었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했을 당시 한국인 약 5만 명이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인한 한국인 사망자를 3만 명으로 추산한 바 있으며, 위령비에는 사망자가 2만 명으로 기록돼 있다.
원자폭탄이 실전에 사용된 것은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핵 공격을 한 것이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원폭의 위력으로 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그 파괴력과 피해규모, 그리고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1945년 8월 6일 8시 15분에서 막 16분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시 상공 570m에서 폭발했다.
인류 최초의 실전용 원자폭탄의 폭발 순간이었다. 우라늄 235 기반 포신형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이었다. 측정된 폭발력은 일반적으로 TNT 15kt으로 알려져 있다.
폭발 지점 인근 온도가 4천도에 육박했고 엄청난 열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사능을 가득 품은 검은 비가 쏟아졌다.
히로시마는 1944년 2월 당시 인구가 35만명에 달했다. 일본에서 8번째로 인구가 많은 산업도시이자 통신 중심지였고, 일본군이 주둔 중이었다.
원폭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히로시마 중심가 7km 지역 내 모든 것들이 폐허로 변했고, 히로시마에서만 14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히로시마 원폭 공격에도 일본 제국주의가 항복하지 않자 미국은 3일 후인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 ‘팻맨’을 투하했다. 이로 인해 나가사키에서는 4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한순간 사망했다.
나카사키에 투하된 플루토늄 폭탄 팻맨의 위력은 21kt로 히로시마에 터진 우라늄 재질의 리틀보이보다 컸다.
하지만 피해규모는 나가사키보다 히로시마가 훨씬 더 컸다. 나가사키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고 산지 지형이었던 데 비해 히로시마는 평야 지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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