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반금액 못 따져도 ‘관련 납품대금’ 기준 정률과징금…대형 유통사 부담 커져
[메가경제=주영래 기자] 대형 유통업체를 둘러싼 공정거래 규제 리스크가 한층 커질 전망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규모유통업법 위반에 대한 과징금 산정 방식을 대대적으로 손질하면서 그동안 위반금액 산정이 어려운 사건에서 사실상 ‘과징금 천장’ 역할을 했던 정액과징금 체계가 크게 축소되기 때문이다.
특히 위반금액을 산정하지 못하더라도 해당 거래의 ‘관련 납품대금’을 기준으로 정률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뀐다. 매입 규모가 큰 백화점·대형마트·홈쇼핑·온라인 유통업체 등은 같은 유형의 법 위반이라도 과징금의 절대 규모가 과거보다 커질 가능성이 있다. 한번의 제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5년간 법 위반 이력이 향후 과징금을 최대 두 배까지 키울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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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통대기업 ‘과징금 폭탄’ 비상 [사진=AI] |
27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이날 ‘대규모유통업법 시행령 개정안’과 ‘대규모유통업법 위반사업자 과징금 부과기준 고시 개정안’을 각각 입법·행정예고했다. 시행령 개정안은 오는 10월 6일까지, 과징금 고시는 9월 16일까지 의견을 받은 뒤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 연내 개정을 마무리할 방침이다.
이번 개편의 핵심은 과징금을 산정할 때 ‘정률과징금 원칙, 정액과징금 예외’를 보다 강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현재는 대규모유통업체의 부당이익이나 납품업체 피해액 등 ‘위반금액’을 산정하기 어려우면 최대 5억원 범위에서 정액과징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정위가 최근 10년간 심결 사례를 분석한 결과 상당수 사건에서 정액과징금이 활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구조가 달라진다. 우선 위반금액을 산정할 수 있으면 ‘위반금액×부과기준율’로 과징금을 계산한다. 위반금액을 산정하기 어려울 때도 곧바로 정액과징금으로 넘어가지 않고 해당 위반행위와 관련된 납품업자로부터 구매한 상품 매입액인 ‘관련 납품대금’을 기준으로 다시 정률과징금을 산정한다.
유통 대기업 입장에서 가장 민감한 대목도 이 부분이다.
기존에는 피해액이나 부당이익을 명확하게 특정하기 어려운 사건의 경우 5억원이라는 정액과징금 상한이 일종의 방어선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 앞으로는 거래 규모를 산정할 수 있는 한 관련 납품대금에 일정 비율을 곱해 과징금을 계산하기 때문에 거래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잠재적인 제재 금액 역시 커질 수 있다.
특히 관련 납품대금은 단순히 문제가 된 일부 상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정안상 위반기간 동안 해당 위반행위와 관련된 납품업자로부터 구입한 전체 상품의 매입액을 기준으로 삼도록 설계됐다. 향후 공정위 조사 과정에서는 ‘어디까지를 위반행위와 관련된 거래로 볼 것이냐’가 과징금 규모를 좌우하는 핵심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과징금 비율 자체도 높아진다.
위반금액을 기준으로 하는 정률과징금의 경우 ‘매우 중대한 위반행위’에 적용되는 부과기준율이 현행 140%에서 180~200%로 올라간다. ‘중대한 위반행위’는 현행 100%에서 150~180%로 높아진다.
위반금액을 산정하지 못해 관련 납품대금을 적용할 경우에는 별도의 정률 기준이 적용된다. 매우 중대한 위반행위에는 관련 납품대금의 9~10%, 중대한 위반행위에는 7.5~9%가 적용된다. 정액과징금 역시 중대성에 따라 하한이 상향된다.
◆한번 걸리면 5년 따라간다…‘상습 위반’ 리스크도 확대
유통업계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반복 위반’에 대한 제재가 대폭 강화되기 때문이다.
법 위반 전력을 따지는 기간은 사실상 과거 3년 중심에서 5년으로 확대된다. 과거 5년간 단 한 차례 법 위반으로 조치를 받았더라도 가중치 기준을 충족하면 과징금이 40% 초과~50%까지 늘어날 수 있다.
2회 위반은 50% 초과~70%, 3회는 70% 초과~90%, 4회 이상이면 최대 100%까지 가중할 수 있다. 기존에는 반복 위반에 따른 가중 상한이 최대 50%였지만 앞으로는 최대 100%로 높아지는 셈이다.
이에 따라 대형 유통사의 공정거래 리스크 관리 방식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는 개별 사건에서 발생하는 과징금과 시정명령 자체가 주요 리스크였다면 앞으로는 한 번의 제재 이력이 향후 5년 동안 추가 사건의 과징금을 끌어올리는 ‘누적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 수많은 점포와 상품기획자(MD), 납품업체를 거느리고 연간 수조~수십조원 규모의 상품을 취급하는 대형 유통업체로서는 본사 차원의 방침뿐 아니라 개별 사업부와 점포에서 발생하는 거래 관행까지 통제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판촉행사 비용 분담이나 납품업체와의 계약, 반품, 판매장려금, 매장 운영 등 일선 영업현장에서 발생하는 거래가 공정거래 사건으로 이어질 경우 해당 법인의 과거 제재 전력과 결합해 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어서다.
◆“일단 고치면 깎아준다”도 옛말…감경 카드 크게 줄어
기업이 법 위반 사실을 뒤늦게 바로잡았을 때 받을 수 있는 과징금 감경 폭도 대폭 축소된다.
현행 제도에서는 공정위 조사 단계와 심의 단계에서 각각 협조하면 총 20%까지 감경을 받을 수 있지만 개정 이후에는 조사부터 심의까지 전 과정에 협조해야 10% 이내 감경이 가능하다.
자진시정에 따른 감경 폭은 더욱 크게 줄어든다. 현재는 납품업체 피해를 원상회복하는 등 위반 효과를 제거하면 최대 50%까지 감경받을 수 있지만 앞으로는 위반 효과를 상당 부분 제거해도 최대 10%까지만 감경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적발 이후 대응’보다 ‘사전 예방’의 중요성이 훨씬 커지는 구조다.
그동안 문제가 발생한 뒤 납품업체 피해를 신속하게 보상하고 조사에 협조해 과징금을 줄이는 방식으로 재무적 충격을 낮출 여지가 있었다면 앞으로는 이 같은 사후 대응만으로 과징금을 큰 폭으로 낮추기 어려워진다.
◆판촉·매입 계약 하나도 법무 검토…유통업계 ‘컴플라이언스 비용’ 커진다
이번 개편은 단순히 과징금 액수를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유통기업의 영업 방식 자체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대형 유통업체들은 납품업체 수가 많고 상품 교체 주기가 짧은 데다 할인행사와 판촉 이벤트가 수시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비용 분담이나 계약 변경 등이 대량으로 이뤄지는 만큼 개별 거래 단계에서 법 위반 여부를 검증하는 내부 통제 시스템의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백화점과 대형마트는 판촉비용과 입점·매장 관련 거래, 홈쇼핑은 방송 편성과 판매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직접 매입 비중이 높은 온라인 유통업체는 상품 매입·판촉 계약 등에 대한 사전 법률 검토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법무·컴플라이언스 인력 확충과 계약 시스템 개선, 거래 데이터 보존 등 규제 대응 비용도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관련 납품대금’이 과징금 산정의 새로운 기준으로 활용되는 만큼 어떤 납품업체·상품·기간이 특정 위반행위와 연결되는지를 입증할 수 있도록 거래 데이터를 세밀하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규제 강화가 납품업체 보호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유통기업의 비용 부담을 높이는 요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할인행사나 공동 판촉을 추진할 때 기업들이 법적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보다 보수적으로 접근할 경우 상품기획과 판촉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특히 내수 부진과 인건비·물류비 상승, 온라인과 오프라인 간 가격 경쟁으로 수익성 방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과징금과 규제 대응 비용까지 늘어날 경우 대형 유통기업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비용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공정위는 이번 개편을 통해 대규모유통업법 위반의 억지력을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올해 공정거래법을 시작으로 하도급·가맹·대리점 분야에서도 과징금 하한 상향과 반복 위반 가중 강화 등을 적용한 데 이어 유통 분야에도 같은 기조를 확대하는 것이다.
결국 이번 제도 개편의 핵심은 ‘위반하면 얼마를 내느냐’에서 ‘과거에 어떻게 거래했느냐’까지 규제 리스크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점이다. 과징금 산정 기반이 확대되고 반복 위반에 대한 제재는 강해지는 반면 감경 여지는 줄어들면서 대형 유통업체의 납품업체 거래 관행 전반이 공정위의 더욱 촘촘한 감시망 안으로 들어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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