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덩샤오핑의 후계자'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96세로 사망…'한중관계 기틀 잡아' 평가

국제 / 류수근 기자 / 2022-12-01 02:31:26
中 3대 최고지도자…3년 두문불출 속 상하이방 몰락과 함께 눈감아
집권기에 자본가 계급 공산당 입당 허용하며 중국 고속성장 이끌어
한국 찾은 첫 중국 국가주석…재임 중 한국 대통령과 10차례 회담
방한 당시 삼성전자·현대차 방문…양국 폭발적 경협 지평 열어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을 잇는 제3대 지도자로서 1990년대 중국의 대국화와 고속 경제도약을 이끌었던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30일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과 중국 CCTV 등에 따르면 장 전 주석은 백혈병 등으로 인해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다 30일 낮 12시 13분(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30일(현지시간)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진은 199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50주년 기념식을 축하하기 위해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국경일 열병식 도중 손을 흔들고 있는 장 전 주석의 모습. [베이징 AFP=연합뉴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국무원 등의 공동 발표에 따르면 장 전 주석은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여러 장기 기능이 쇠약해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이날 숨을 거뒀다.

당 중앙위 등은 “장쩌민 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군, 각 민족 인민에게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라며 “당 중앙은 모든 사람에게 슬픔을 힘으로 바꾸고 동지의 유지를 계승하며 실제 행동으로 애도를 표하기를 호소한다”고 밝혔다.

당 중앙위 등은 장 전 주석을 “중국 특색 사회주의 위대한 사업의 걸출한 지도자, 당의 제3대 중앙 영도집단의 핵심, ‘3대 대표 중요 사상’의 주요 창설자”였다고 평가했다.

▲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의 장쩌민 전 국가주석 추모 페이지. [바이두 캡처]

장 전 국가 주석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온라인 사이트들은 일제히 흑백화면으로 전환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중국 국무원과 외교부 등 주요 정부 기관 인터넷 사이트는 물론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와 관영 매체 홈페이지들은 컬러화면을 흑색으로 바꿨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임을 맡은 장례위원회는 ‘추도 대회’가 열리는 날까지 베이징 톈안먼, 인민대회당, 신화문, 외교부, 해외의 대사관 및 영사관 등에 조기를 게양키로 했다. 또 재외공관 등에 빈소를 마련해 외국 인사들의 조문을 받기로 했다.

다만 중국 관례에 따라 외국 정부, 정당, 우호 인사 등의 조문단은 초청하지 않기로 했다고 장례위는 밝혔다.

하지만 퇴임한지 20년이 지난데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강력한 권력 기반을 다지고 있는 상태여서 장 전 주석의 사망에 따른 중국 내 정치적 파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 지난 201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70주년 기념식을 위한 국경일 열병식이 시작하기 전 톈안먼 광장에서 시진핑 주석(왼쪽)이 장쩌민 전 주석(가운데)과 리커창 총리 옆에 서 있다. [베이징 로이터=연합뉴스]

장쩌민 전 주석은 격변의 시기였던 1993년부터 2003년까지 국가주석으로 재임했고 톈안먼 시위와 구소련 몰락으로 위기를 맞았던 중국 내부 정치를 안정시키면서 경제를 발전시켰다.


장 전 주석은 1926년 8월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났지만 상하이 시장과 당 서기를 지냈고 오랜 기간 상하이에서 생활했다.

장 전 주석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 전 당 총서기의 뒤를 이어 덩샤오핑(鄧小平)의 눈에 들어 당 총서기에 오른 뒤 15년 동안 중국 최고 권력을 움켜쥔 채 중국 경제 발전을 지휘했다.

당초 당 중앙이나 군에 권력 기반을 두지 않아 과도정권에 그칠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덩샤오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확대해나갔다. 1989년 덩샤오핑으로부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넘겨받았고 1993년엔 국가주석에 올라 당‧국가‧군 3권을 장악했다.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직을 각각 후진타오에게 넘겨줬으나 중앙군사위 주석직에는 2004년까지 머물며 영향력을 유지했다.

▲ 정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주요 연보. [그래픽=연합뉴스]

장 전 주석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과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숨긴 채 실력을 키움) 노선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미국 등 서방과의 원만한 관계 속에 중국의 비약적 경제 성장을 일궜다.

그가 당 총서기가 된 1989년 1조7200억 위안(약 319조 원)이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그의 실질적 임기 마지막 해인 2002년 약 7배인 12조1700억 위안(약 2260조 원)으로 커졌다.

장 전 주석은 최고 지도자로 재임할 당시 굵직굵직한 정치, 경제, 외교의 이정표를 세웠다.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유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2001년), 홍콩(1997년)과 마카오의 반환(1999년) 등이다.

그늘진 면도 있었다. 민주화 운동가들과 파룬궁에 대한 탄압 등 인권 침해 관련 지적과 경제 성장의 뒷그늘에서 심화한 빈부격차, 관리들의 부정부패 등은 비판을 받는 소재가 됐다.

장 전 주석의 대표 사상은 ‘3개 대표 이론’으로, 전통 사회주의 국가에서 배척받는 자본가 계급을 끌어안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2002년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중국공산당 당헌(黨章)에 ‘3개 대표 중요 사상’으로 정식 삽입됐다.

장 전 주석은 집권기에 상하이 지역 인사들을 대거 중앙에 발탁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한 정계 인맥인 상하이방(上海幇)을 형성했다.

▲ 장쩌민 예상 장례 절차. [그래픽=연합뉴스]

은퇴 이후에도 막후 실력자로 영향력을 지속했으나 시진핑 주석이 2012년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시진핑의 ‘정적세력’으로 분류되면서 점차 위상이 약화됐다. 상하이시 지도부도 시진핑 인맥으로 교체되면서 상하이방의 몰락은 가속화했다.

은퇴 후에는 종종 건강불안설이 불거졌으며 지난 3년간은 철저하게 두문불출했다. 2019년 10월 신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식 참석을 마지막으로 외부 공식 활동을 중단했다. 

 

장 전 주석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동안 ‘상하이방’도 몰락했다.그는 한국을 찾은 첫 중국의 최고 지도자이자 한중 수교 이후 경제 협력을 중심으로 한 양국 관계 기틀을 잡은 인물이기도 하다.

2003년 3월 국가주석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과 총 10차례에 걸친 회담을 통해 중국의 개혁·개방 기조에 맞춰 한중 간 폭발적 경협의 지평을 열어냈다.
 

▲ 지난 1995년 11월 15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 지난 2000년 11월 15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브루나이 오키드 가든 호텔에서 김대중 대통령과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양국 수교는 장 전 주석의 전임 지도자인 양상쿤(楊尙昆) 전 국가 주석과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인 1992년 8월에 성사됐다. 그 이듬해 국가주석에 오른 장 전 주석은 한국과 활발한 정상 외교를 펼치며 중국 내 새로운 한반도 정책의 변화를 끌어냈다.

1993년 국가주석이 된 장 전 주석은 같은 해 11월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 시애틀에서 만나 자신이 중국 최고 권력자가 된 후 첫 한중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김 전 대통령의 방중,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APEC 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두 차례 한중 정상회담을 추가로 진행한 그는 1995년 11월 중국 국가 주석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김 전 대통령과 만남을 이어갔다.

장 전 주석은 당시 4박 5일간의 한국 방문 기간 정상회담 이외에도 공동기자회견, 국회 연설, 제주도 방문 등의 빡빡한 일정을 수행했다. 특히 당시 한국 국회에서 행한 연설은 중국 국가원수로서는 외국 국회에서 진행한 최초의 연설이었다.

당시 그는 국회 연설에서 양국 간 경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과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을 방문했다.

▲ 지난 1995년 11월 16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울산 현대자동차를 방문, 관계자와 대화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기흥에서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안내로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봤으며 “양국 간 기술 협조가 절실할 때”라고 강조했다. 울산에서는 현대차 공장을 시찰하며 현대 자동차의 중국 진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장 전 주석은 방한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과 다자 정상회의를 계기로 2차례 더 만났으며 이후 취임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4차례 정상 간 대면 소통을 진행했다.

우리 외교부는 이날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관계 발전을 위해 공헌했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 정부는 장 전 주석이 1992년 한중수교 등 한중관계 발전을 위해 공헌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며 "그의 영면을 기원하며 유가족에게도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장 전 주석의 사망과 관련해 중국에 조전 발송 계획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련해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장 전 주석의 유가족으로는 부인 왕예핑 여사, 장남 장멘헝, 차남 장멘캉이 있다. <연합뉴스‧외신 종합>

[메가경제=류수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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