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식료품·월세 등 수십년만에 최대폭 상승…휘발유 48.7%↑
팬데믹 후 수요 증가·우크라 전쟁 등 영향으로 유가 고공행진
예상 뛰어넘은 인플레에 연준 ‘빅스텝’ 넘어 ‘자이언트스텝’ 전망도
9월 이후에도 고강도 통화긴축 가능성 커져...경기침체 우려도 확산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시장 전문가들의 예상치를 웃도는 8.6%를 기록하면서 이번 주 금융시장의 관심은 온통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정례회의에 쏠리고 있다.
미 노동부는 10일(현지시간)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월 대비 8.6%나 급등했다고 밝혔다.
전월(8.3%)보다 오름폭이 커진 것은 물론 1981년 12월(8.9%)이후 40년 5개월만에 최고 상승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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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영향으로 미국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41년만에 최대폭인 8.6%를 상승했으며 고공행진 중인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5달러를 넘어섰다. 사진은 10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맥클린 소재 주유소 모습. [AFP=연합뉴스] |
CPI 상승률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 3월 8.5%로 40년 3개월만의 최고치를 찍은 뒤 4월 8.3%로 다소 내려갔다가 시장 전망치를 넘어서는 오름세로 다시 전환했다.
전월 대비로도 1.0% 급등해 지난 4월 상승폭(0.3%)을 크게 넘어섰다. 특히 시장 전문가들의 예상치보다 높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집계한 5월 CPI 상승률 전망치는 8.3%였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도 전년 동월보다 6.0%, 전월보다 0.6% 각각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이 역시 1981년 이후 미국 소비자들이 처음 경험하는 수치다.
전년 동월 대비 근원 CPI 상승률은 4월(6.2%)보다 다소 낮아졌으나, 전월 대비 상승률은 4월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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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소비자물가 추이. [그래픽=연합뉴스] |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에너지는 전년 동월보다 34.6% 치솟아 2005년 9월 이후 가장 크게 올랐고, 이 중 휘발유는 같은 기간 48.7% 폭등했다. 휘발유 가격은 6월 들어 연일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우고 있어 6월 CPI 발표에서도 휘발유 가격 폭등세는 이어질 전망이다.
에너지 가격은 기록적인 휘발유 가격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기요금은 12% 올라 2006년 이후, 천연가스 가격은 30.2% 올라 2008년 이후 각각 가장 큰 상승폭을 보였다. 이같은 에너지 가격 상승만으로도 미국의 5월 CPI는 2%포인트 상승했다.
에너지 가격만 치솟은 게 아니다. 소비자물가지수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주요 요소들이 올랐다.
식료품은 1년 사이 11.9% 급등해 1979년 4월 이후 43년 만의 최대폭 상승했고, 계란은 32.2%, 우유는 15.9%, 가금류는 16.6% 올랐다. 전체 CPI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임대료 등 주거비용도 5.5% 올라 1991년 이후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
지난 3개월 동안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던 중고차 가격도 다시 상승해 16.1%나 상승했다. 반도체 부족에 시달리며 공급부족 사태를 빚고 있는 신차는 같은 기간 12.6% 올랐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상당부분 풀리면서 항공여행 수요가 크게 느는데다 유가 상승이 겹치면서 항공요금은 37.8% 상승했다.
이러한 물가 급등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에너지·식량 등 원자재 부족 사태와 중국의 코로나19 봉쇄 조치, 전 세계적인 가뭄에 따라 글로벌 공급망이 더욱 꼬인 여파로 물가 상승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 유력하다.
5월 CPI가 발표되자 물가의 정점 통과 확인을 기대했던 시장은 인플레이션 장기화 가능성과 연준의 더 강한 긴축에 대한 우려로 잔뜩 겁을 먹었다.
당장 미국의 소비자물가가 40여년만에 최대폭으로 치솟았다는 소식에 같은 날의 뉴욕증시는 급락했다.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는 전장보다 880.00포인트(2.73%) 떨어진 3만1392.79에 장을 마감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는 116.96포인트(2.91%) 떨어진 3900.86에,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는 414.20포인트(3.52%) 급락한 1만1340.02에 각각 금요일 거래를 마쳤다.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길어진다’는 공포가 시장을 덮으면서 연준이 금리를 더 가파르게 끌어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금융시장 전체를 짓누른 탓이다.
기준금리 동향에 가장 민감한 2년물 미 국채 금리는 이날 2.815%에서 하루 만에 3% 선을 돌파해 2008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랐다.
그 결과 금리에 부담을 느끼는 기술주들이 일제히 하락했다. 엔비디아는 6.0%, 아마존은 5.6%, 마이크로소프트(MS)는 4.5% 각각 급락했고, ‘대장주’ 애플마저 3.9%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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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기준금리 추이. [그래픽=연합뉴스] |
5월 CPI 수치는 연준이 물가를 잡기 위해 더욱 매파(통화긴축 선호)적인 통화정책을 밀어붙일 것이라는 관측을 강화하고 있다.
이번 발표 직전까지만 해도 5월에 이어 6월과 7월까지 3연속 ‘빅스텝’(한 번에 0.5%포인트 금리인상)을 예고한 연준에 대해 오는 9월에는 잠시 금리인상을 쉬어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섞인 관측이 일각에서 제기됐었다. 그러나 이번 CPI 수치는 인플레이션 장기화 우려를 증폭시켜 9월 이후에도 빅스텝을 이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현재로서는, 연준이 오는 14~15일(현지시간) 열리는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시장 예상대로 정책금리를 0.50%포인트 인상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예상치를 상회한 5월 CPI 수치에 일각에서는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까지 밟을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연준은 지난 1994년 이후 한 번도 이처럼 급격한 금리인상을 단행한 적이 없다.
시장은 연준이 금리 인상 움직임 속에 지난 1일부터 양적 긴축을 시작해 전 세계 유동성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 수 있다는 점도 염려하고 있다.
양적 긴축이 이뤄지면 달러 공급이 줄어들 수 있다. 더욱이 달러화가 초강세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유동성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각종 지표가 악화하자 물가 급등으로 인한 향후 소비 지출 감소 가능성과 연준의 급격한 금리인상이 맞물려 경기침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월가의 족집게’로 불리는 손성원 미국 로욜라메리마운트대 경제학과 교수는 “인플레이션은 악화 전망과 함께 점점 더 높고 넓어지고 있다”며 “내년쯤에는 경기 침체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갉아먹고 있다. 소비지출이 경제의 약 70%를 차지하기 때문에 실제 소비지출이 줄어들면 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고 말했다고 CNN은 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국제유가가 치솟으면서 미국 휘발유 가격도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미국의 5월 CPI 수치 급등 보고서가 발표된 이튿날인 11일(현지시간)에는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이 처음으로 1갤런(3.78ℓ)당 5달러(약 6400원)를 넘어섰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미 자동차협회(AAA) 집계에 따르면 미국 내 일반 무연 휘발유 평균 가격이 전날 갤런당 4.986달러에서 이날 5.004달러로 오르면서 5달러를 돌파했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미국 내 휘발유 평균 가격은 지난 한 주 사이에만 0.19달러(약 243원) 올랐다.
코로나19 대유행에서 벗어나며 원유 수요가 증가한 상황에서 최대 산유국 중 하나인 러시아에 서방 주요국들이 원유 금수 조처를 강화하면서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미국 현충일·5월 30일)를 기점으로 여름 여행 급증하는 ‘드라이빙 시즌’이 본격화된 것도 미국 내 유가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지목된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은 지난달 보고서에서 미국 내 휘발유 소매 가격이 8월께 1갤런당 6.20달러(약 7930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연료가격 상승은 가뜩이나 높은 수준인 인플레이션을 더욱 밀어 올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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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5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예상치를 넘어서면서 10일(현지시간) 금요일 다우존스산업평균, S&P, 나스닥 등 3대 지수가 일제히 급락했다. 사진은 10일(현지시간)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트레이더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 [신화=연합뉴스] |
꺾일 줄 모르는 인플레이션 장기화에 연준의 금리인상 보폭은 더욱 넓어지고, 이는 다시 소비지출과 투자심리를 짓누르면서 세계적 성장 둔화로 이어져, 물가는 오르고 경기는 가라앉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는 형국이다.
세계은행(WB)은 지난 7일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에서 올해 세계경제 성장률 전망을 2.9%로 지난 1월 전망보다 1.2%포인트 낮춰 잡았다.
세계은행은 성장률 하향 조정의 주요 원인으로 2년 이상 지속된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인플레이션, 공급망 불안정성, 재정·통화긴축정책 등을 꼽았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에너지 시장의 가격급등과 불안정성이 심화하고,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개도국의 빈곤악화 등을 초래하고 있으며, 세계적 인플레이션은 선진국의 통화긴축정책을 야기하고 이는 이자비용 증가에 따른 개도국의 재정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정책대응책으로 성장·거시경제 프레임워크 강화, 재정 불안정성 완화,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 등 강제적이고 다각적인 정책의 추진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세계은행은 추가적인 공급 충격으로 인플레이션 기대를 자극할 가능성이나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을 유지할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지난해까지 인플레이션에 대해 ‘일시적’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다 문제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도 최근 물가 대응에서 오판을 시인하는 등 미국 당국에 대한 신뢰가 일부 훼손된 상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정책 신뢰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주 연준 정례회의에 세계 경제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메가경제=류수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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