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공급망 가점 부재 논란…수주 성패가 글로벌 진출 레퍼런스 좌우
[메가경제=박제성 기자] 이용배 현대로템 사장이 약 5조원 규모로 예상되는 국내 차세대 KTX 세대교체 사업을 앞두고 30년간 축적한 국산 고속철 기술력과 국내 공급망을 승부수로 꺼내 들었다.
다만 철도업계에서는 국내 기업이 높은 국산화율과 공급망 기여도를 확보했음에도 이 같은 요소가 입찰 평가에서 별도 가점으로 반영되지 않아 해외 업체와의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구조에 놓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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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용배 현대로템 사장. [사진=AI] |
프랑스 기술을 들여와 출발했던 한국 고속철이 30년 만에 자체 기술을 앞세워 ‘안방 수성전’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차세대 KTX 수주전은 현대로템의 일감 확보를 넘어 국산 고속철 기술과 국내 철도산업 생태계가 글로벌 철도기업의 공세를 안방에서 버텨낼 수 있을지를 가르는 승부처가 될 전망이다.
6일 철도업계에 따르면 국산화율과 국내 공급망 기여도를 입찰 평가에 별도로 반영하지 않는 현행 구조가 유지될 경우 국내 기업이 30년간 쌓아온 기술 자립과 산업 생태계 구축 성과가 정작 국내 수주전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역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현재 운행 중인 KTX-1을 대체하고 수송력을 확대하기 위해 최고속도 320㎞급 동력분산식 고속열차 총 49편성·784량을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편성당 16량 규모다.
전체 사업비는 약 5조원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1차분 28편성·448량은 2027년 발주가 예상된다.
차세대 차량에는 기존 KTX-1이나 KTX-산천과 같은 동력집중식이 아니라 KTX-이음과 KTX-청룡에 적용된 동력분산식이 채택될 전망이다.
동력분산식은 동력장치를 여러 객차에 분산 배치해 별도의 동력차가 필요하지 않아 같은 열차 길이에서도 객실 공간을 더 확보할 수 있고 가·감속 성능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 8량 KTX-청룡은 515석으로 KTX-산천 379석보다 좌석 수가 약 35% 많다.
이용배 사장에게 이번 사업은 국내 최대 규모 철도 수주전인 동시에 현대로템이 지난 30년간 축적한 고속철 기술 경쟁력을 입증해야 하는 무대다.
이 사장은 처음부터 철도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은 아니다. 전주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현대차와 현대위아, 현대차증권 등을 거쳐 2020년부터 현대로템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 고속철의 출발점은 프랑스 기술이었다. 한국은 1994년 프랑스 TGV 제작사 알스톰과 고속철도 차량 도입 및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한 뒤 국내 고속철 기술 축적에 나섰다.
이후 KTX-산천과 KTX-이음, KTX-청룡 등을 거치며 자체 개발 비중을 높였고 현재 한국형 고속철의 국산화율은 87% 이상으로 올라섰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1~3차 협력사를 포함하면 약 200개 국내 업체가 고속철 공급망에 참여하고 있다.
◆ 이 사장 “끝까지 최선”…차세대 KTX 기술 자신감
이 사장은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이노트란스 2026’에서 차세대 고속열차 수주전과 관련해 “입찰은 마지막까지 알 수 없다”며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차세대 차량의 기술 수준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보였다. 현대로템은 현대자동차그룹과 공동 개발한 차세대 고속차량 콘셉트를 공개하고 공기저항 저감과 승객 편의성 개선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현대차 공력개발팀과 약 520시간에 걸쳐 열차 주변 공기 흐름과 저항을 분석하는 공력해석과 풍동시험을 진행했다.
회사에 따르면 콘셉트 모델 기준 공기저항계수는 KTX-청룡보다 약 36% 낮아졌다. 실내 공간과 승객 편의성도 강화했다는 설명이다.
◆ 알스톰 등 ‘안방 공습’ 가능성…국산화 87%인데 가점은 ‘제로’
관건은 해외 업체와의 경쟁이다. 사업이 국제 경쟁입찰 방식으로 진행될 경우 프랑스 알스톰과 독일 지멘스, 스페인 탈고 등 글로벌 철도기업이 직접 참여하거나 국내 기업과 손잡고 수주전에 뛰어들 가능성이 거론된다.
앞서 2023년 SR이 발주한 EMU-320 고속열차 도입·정비 사업에서도 우진산전이 스페인 탈고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현대로템에 도전한 전례가 있다.
특히 한국의 1세대 KTX에 기술을 공급했던 알스톰이 30여년 뒤 교체 사업에 다시 뛰어든다면 프랑스 기술을 도입해 시작한 한국 고속철과 국산화된 한국 고속철이 같은 시장에서 맞붙는 상징적인 경쟁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국산화율과 국내 공급망 기여도를 입찰 평가에서 어떻게 다룰지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대로템의 고속철 국산화율이 87%를 넘어섰고 수백개 국내 업체가 공급망에 참여하고 있지만 현행 국내 고속철 입찰에서는 이러한 요소가 별도 가점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철도산업은 정부와 공공기관 발주 의존도가 높은 만큼 개별 기업이 입찰 기준 변경이나 국산화 우대 적용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한계도 있다.
실제로 과거 SRT 차량 발주 과정에서도 국내 철도 협력업체 대표들이 국산 부품 사용과 국내 공급망 기여도를 입찰 평가에 반영해 달라며 목소리를 낸 바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철도 시장 규모가 해외에 비해 크지 않은 데다 철도 기술이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하면서도 사업 수익성이 높지 않아 기업 입장에서는 기술과 공급망을 유지하는 데 적지 않은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 국내 수주가 해외 ‘입장권’…국산 제작사 넘어 글로벌 사업자 시험대
국내 수주 실적이 향후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핵심 ‘레퍼런스’로 직결된다는 점도 이번 수주전의 중요성을 키우는 대목이다.
고속철처럼 대규모 실적과 장기간 운행 이력이 수주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장에서는 자국 발주 사업에서 확보한 제작·운행 실적이 해외시장 진출의 중요한 발판으로 작용한다.
우진산전이 과거 고속철 수주전에서 스페인 탈고와 손잡은 배경에도 첫 고속철 제작 실적을 확보한 뒤 이를 토대로 글로벌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전략이 깔렸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국내 고속철 기술이 부족했던 시기에는 프랑스 TGV 기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이를 단순히 ‘국산 제품에 가점을 줘야 한다’는 문제로만 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한 번 발주하면 수십년간 운행하는 고속철 차량은 완성차 제작사를 넘어 국내 부품·장비업체의 일감과 기술 축적, 유지보수 산업까지 연결된다. 국내 제작·운행 실적은 향후 해외 고속철 사업에서 성능과 안정성을 입증하는 수출용 레퍼런스로도 활용된다.
따라서 국산화율과 공급망 기여도를 별도로 평가하지 않는 현행 체계가 국내 철도산업의 기술 축적과 공급망 유지라는 산업적 가치까지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용배 사장에게 이번 차세대 KTX 사업의 의미가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로템은 2024년 우즈베키스탄에 국산 고속철을 처음 수출하며 해외 고속철 시장에 진입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알스톰과 지멘스, 중국 CRRC 등과 비교해 여전히 후발주자에 속한다.
차세대 KTX 수주에 성공해 국내에서 새로운 제작·운행 실적을 확보할 경우 향후 해외 대형 고속철 프로젝트에서 기술력과 공급 안정성을 입증할 핵심 레퍼런스를 추가할 수 있다.
반대로 글로벌 철도기업과의 안방 경쟁이 본격화하면 현대로템이 지난 30년간 축적한 국산 고속철 기술과 국내 공급망의 경쟁력을 가격과 성능으로 직접 입증해야 하는 시험대가 된다.
업계 관계자는 “차세대 KTX 사업은 국내에서 축적한 고속철 기술과 공급망의 가치를 발주 과정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묻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며 “이 사장에게도 현대로템이 ‘국산 고속철 제작사’를 넘어 글로벌 고속철 사업자로 도약할 수 있을지를 가르는 중요한 승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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