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스토리] 화폐 역사에서 한국 근·현대史
기해년 정초,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가다
유원형
webmaster@megaeconomy.co.kr | 2019-03-18 21:12:20
[메가경제 유원형 기자] 2018년 한국경제는 하반기로 들수록 암울한 수치들이 많았다. 고용률은 저조하고 실업률은 높아졌다. 경제성장률도 예상을 밑돌았다. 반도체 호황으로 수출이 그나마 전체적인 통계의 급락을 지탱했다. 그리고 올해 2019년의 경제는 한층 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힘들어진 건 아니다. 오히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됐다. 반면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더 힘들어졌다. 사회 곳곳에서 양극화가 심화됐다.
모든 경제주체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알고 보면 모두 ‘돈’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돌고 도는 게 돈이라지만 “왜, 내 주머니 속에는 돈이 아니라 먼지만 풀풀 날릴까”라며 오늘도 사람들은 긴 한숨을 내쉰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벌고 쓰느냐에 따라 최선의 종이 될 수도, 최악의 주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2018년 12월 현재, 시중의 현금에 요구불예금과 수시입출식예금을 더한 M1(협의통화, 평잔)는 847조7653억원이고, M1에 정기예·적금, 시장형 금융상품, 실적배당형 금융상품, 금융채 등을 더한 M2(광의통화, 평잔)는 2716조7402억원이다.
2019년 기해년은 황금돼지해라고 한다. 새해를 맞이하며 올해는 집안의 곶간이 가득하기를 빌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터다.
황금돼지해를 맞아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39에 위치한 한국은행 화페박물관을 찾아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 ‘돈’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 개항기 화폐
1976년 개항과 함께 대외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근대적인 화폐가 필요해졌다. 이에 당시 조선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조폐기관인 전환국(典?局)을 설립하고, 금과 은을 기준으로 화폐의 가치를 정하는 금·은본위제도를 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늘어나는 지출을 메우기 위해 소재의 가치가 낮은 당오전(當五錢) 등을 대거 발행하고, 외국화폐까지 국내에 유통되면서 금·본위제도 도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화폐경제는 더욱 혼란해졌다.
전환국은 1883년(고종 20년)에 설립되었고, 1888년 태극휘장, 은화 1종(1환)과 적동화 2종(10문, 5문)을 시험적으로 소량 만들었으나 시중에서 거의 사용되지 못하였다. 1892년에는 일본에서 수입하는 주화용 원료를 보다 편리하게 운반하기 위하여 서울에 있던 전환국을 인천으로 옮겼다.
조선은 1894년 은을 기준으로 화페의 가치를 정하는 은본위제도를 채택한다는 ‘신식화폐발행장정’을 공포하였으나 제작한 은화의 양이 너무 적어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 대한제국 시대의 화폐
대한제국은 1901년 금본위제도의 채택을 목적으로 ‘화폐조례’를 제정하였고, 1903년에는 ‘중앙은행조례’와 ‘태환금권조례’를 공포하는 등 은행제도를 포함하는 근대적인 화폐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외세의 압력과 준비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강화도조약(1876년) 이후 야심에 가득찬 일본의 금융업이 조선에 침투했다. 조약 후 2년 뒤인 1878년(고종15년) 일본의 제일은행이 부산에 지점을 열었다.
제일은행은 1902년에는 대한제국 정부의 허락도 없이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이에 우리 국민은 제일은행권을 사용하지 말자는 배척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 정부가 개입하는 바람에 유통을 막지는 못하였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식민지 중앙은행을 세우기 위해 1909년 ‘한국은행조례’를 공포하고, 주식회사 형태의 구(舊) 한국은행을 설립하여 화폐 발행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금본위제도를 채택하는 골자의 ‘광무9년 화폐조례’를 공포한 뒤 최초의 금화 3종을 탄생시켰다. 1906년에 이십원 (二十?) 금화와 십원(十圓) 금화를, 1908년에는 오원(五?) 금화를 발행하였다.
일본 오사카조폐국에서 발행한 이 금화들은 발행 수량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회수되어 전쟁비용 등으로 쓰이면서 실제 유통된 수량은 매우 적었다.
금화의 앞면에는 조선 왕실의 상징인 자두꽃(李花)을, 뒷면에는 왕의 상징인 용을 넣었다.
◆ 일제 강점기와 광복 직후의 화폐
1910년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은 1911년 3월 구(舊)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바꾸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은행권을 마구 발행하여 일본의 전쟁 비용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선은행은 명맥을 유지했다. 미군정의 법령에 따라 조선은행이 계속 중앙은행 역할을 맡게 되면서 조선은행권은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은행은 조선총독부 산하에서 은행권의 발행, 국고사무의 취급, 정부 대출 등 중앙은행으로서의 업무를 주로 수행하였지만, 예금과 대출 등 일반은행의 업무도 행했다.
조선은행이 처음 설립되었을 당시에는 이미 구 한국은행권과 일본의 제일은행권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14년 9월 1일 비로소 조선은행 명의의 100원권을 발행하였다.
조선은행은 광복 이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화폐도안에서 일본어 문구를 빼고 일본 정부의 휘장인 오동나무 문양을 무궁화로 바꾸는 등 준비작업을 거쳐 총 8종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이후에도 조선은행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은행이 세워질 때까지 무궁화와 독립문 도안을 넣은 10원권, 5원권 외에 50전권, 10전권, 5전권 등 총 5종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하였다.
광복 전후에 발행되지 못한 조선은행권도 있었다. 제조 후 미발행된 조선은행권은 1000원권 3종으로 이들 최고액권은 비상시에 대비하여 제조된 것이었다. 하지만 광복 직전 일본인들이 정략적으로 제조한 이 1000원권은 광복 후 화폐의 증발을 이유로 발행되지 못했다.
◆ 한국은행과 '한국은행권'의 탄생
1945년 8월 광복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는 물자부족과 남북분단 등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물가는 급등하고, 금융 질서는 혼탁해져 이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은행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사회 각계에서 활발히 일어났다.
한국은행법 초안은 미국 뉴욕연방준비은행에서 나온 블룸필드 박사(A.I.Bloomfield)가 마련하였고, 이를 토대로 1950년 5월 한국은행법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은 통화금융정책, 은행감독 및 외국환관리에 관한 광범위한 정책기능을 수행하는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으로서 업무를 개시하였다.
한국은행은 설립 이후 여러 종류의 은행권과 주화를 발행하였다. 한국전쟁 중에 최초의 한국은행권을 발행하였다.
한국은행은 설립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인위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조절하는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다.
첫 번째는 1953년 2월 17일에 단행됐다. 전쟁으로 인한 화폐가치의 하락과 물가상승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화폐단위를 1/100로 내리는 통화조치를 단행하여 ‘환’ 표시 화폐를 발행하였다.
두 번째는 1962년 6월 10일 실시됐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다시 화폐단위를 1/10로 내려 ‘원’표시 화폐를 발행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물가가 오르면서 통화수요를 고려해 고액권인 10000원권(1973년)과 50000원권(2009년)을 새로 발행하였다.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의 화폐단위는 ‘냥(兩)-원(?)-원(圓)-환(?)-원’ 순으로 바뀌어왔다.
냥(兩, Yang)은 무게의 단위에서 유래한 명칭으로서 개항(1876년) 이전부터 화폐단위로 사용되었다. 1냥은 100문(文), 즉 엽전 100장이었다.
원(?,Won)은 1901년(광무 5년) ‘화폐조례’가 공표되면서 화폐단위로 등장하였으나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고, 원(圓, Won)은 1905년(광무 9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화폐단위이다. 그리고 환(?, Hwan)은 1953년 제2차 통화조치 때 등장한 화페단위이다.
현재 사용하는 ‘원(Won)’은 1962년 제3차 통화조치 때 등장하여 현재까지 사용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화폐 단위이다.
◆ 최초의 한국은행권 발행과 제1~2차 통화조치
한국은행은 새로운 은행권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설립됐다. 이 때문에 한국은행은 기존의 조선은행권과 소액의 보조화페를 공식 화폐로 병행 사용하면서 신권 발행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전쟁을 맞았고, 한국은행은 현금부족 사태를 막기 위해 일본의 대장성 인쇄국에서 1000원권과 100원권을 제작하여 1950년 7월 22일 피난지인 대구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을 발행하였다.
북한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우리나라의 경제를 어지럽힐 목적으로 점령지역 내에서 북한 화폐인 인민권을 강제로 사용하도록 하였고, 빼앗은 조선은행 1000원권과 100원권을 접전 지역에서 유통시켰다.
이에 우리 정부는 경제 혼란을 막기 위해 1950년 8월 28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0호’를 발동해 조선은행의 100원권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1차 통화조치였다.
이에 따라 사용이 정지된 조선은행 100원권은 이후 한국은행권으로 1:1 맞교환해 주었다.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크게 오르고 하폐의 가치가 급락함에 따라 무엇보다 물가안정이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53년 2월 15일 제2차 통화조치를 단행했다.
골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모든 화페의 사용을 금지하고 화폐단위를 원(圓)에서 환(?)으로 변경(100圓→1?)하는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환(?)’ 표시 은행권은 통화조치에 대비해 광복 직후 미국 재무부 인쇄국에서 만들어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해 오던 것이었다.
한국은행은 1953년 2월 17일부터 화폐의 단위를 1/100으로 변경한 ‘환(?)’ 표시 한국은행권 5종(1000환권, 100환권, 10환권, 5환권, 1환권)을 발행하였다. 이와 함께 그동안 사용되던 ‘원(圓)’표시 한국은행권의 유통을 중지시켰으며, 그동안 통용되던 한국은행권과 함께, 저액면용으로 통용되어 오던 7종류의 조선은행권과 일본 정부의 소액보조화폐(1餞 주화)의 유통도 전면 중지시켰다.
‘환’ 표시 한국은행권만을 유일한 법화로 인정한 것이다. 이에 따라 비로소 한국 화폐의 완전한 독자성이 확보되었다.
최초의 한국은행 주화도 탄생한다. 전쟁의 시련을 극복하고 물가가 안정되고 산업활동도 정상화됨에 따라, 한국은행은 화폐체계 정비와 화폐 제조비 절감은 물론 원활한 소액 거래를 위해 미국 필라델피아 조폐창에서 3종(100화, 50환, 10환)의 주화를 제조하여 1959년 10월 발행하였다.
◆ 경제질서 확립과 제3차 통화조치
1960년 4.19혁명 이후 한국은행은 경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도안의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우선 1960년 8월 15일 도안을 세종대왕으로 바꾼 1000환권을 발행하였고, 이어 1961년 4월 19일에는 역시 세종대왕을 도안으로 사용한 500환권을 내놓았다.
이외에도 1962년 5월 16일에는 100환권을 개정한 100환권도 발행하였다. 하지만 이 돈은 같은 해 6월 10일 제3차 통화조치 시행으로 인해 발행된 지 24일 만에 사용이 정지됐다. 발행된 이래 가장 짧은 기간 사용된 한국은행권이다.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1962년 6월 10일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조치로 인해 당시까지 사용하던 ‘환’ 표시 화폐의 사용이 금지되고, 화폐의 금액을 1/10로 낮춘 한글 ‘원’ 표시 화폐가 발행되었다.
이에 따라 500원권, 100원권, 50원권, 10원권, 5원권, 1원권이 발행됐다.
우리나라 돈은 이후 더 이상 화폐가치의 변화를 겪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양식의 은행권으로 고도화한다.
1965년 한국조폐공사는 인쇄 부분이 튀어나와 손으로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요판인쇄 시설을 도입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1965년 8월 100원권, 1966년 8월 500원권, 1969년 3월 50원권 등 요판 인쇄를 이용한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이로써 1962년 3차 통화조치 때 영국에서 제조해 발행한 은행권 중에서 5원권과 1원권은 주화로 바뀌고 나머지 은행권은 모두 국내에서 만들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경제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물가가 상승함에 따라 고액권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한국은행은 1972년 7월 5000원권에 이어 1973년 6월 10000원권을 발행하였다.
발행 직전에 사라진 화폐도 있었다. 1972년에는 10000원권을 발행하기로 하고 발행공고까지 마쳤으나 특정 종교에 편향된 소재가 사용되었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결국 빛을 보지 못하였다.
◆ 화폐 디자인 고도화 및 위조방지요소 강화
한국은행은 1982년 1월 화폐의 크기와 도안을 크게 바꾼 새로운 은행권과 주화를 발행하였다. 이때 발행된 신권에는 숨은그림을 삽입하고 특수염료를 사용하였다.
또한 금액을 표시하는 점자를 넣어 시각 장애인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폐의 원료를 순면으로 바꾸어 품질을 높였다. 주화의 경우에는 자동판매기의 보급 등으로 사용금액이 커짐에 따라 새로 500원화를 발행하였다.
정부는 1973년부터 화폐도안용 영정을 제작할 때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이로써 1973년 9월 발행한 500원권의 이순신 장군부터는 표준 영정을 사용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컬러 복사기, 스캐너 등 컴퓨터 관련기기가 널리 사용되면서 화폐 위조가 크게 늘어났다. 이에 한국은행은 2006년에 5000원권, 2007년에는 10000원권과 1000원권에 위조방지요소를 강화한 새로운 시리즈의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한국은행은 또한 2009년에는 위조방지장치를 더욱 강화한 현 50000원권을 새로 발행하였다.
50000원권의 도안인물은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서화가로서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다. 특히 ‘조충도’ 등을 잘 그린 것으로 전해지며 초서와 전서 등의 글씨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은?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은 우리나라 초기 근대 건축물로서 대한민국 금융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유서깊은 곳으로, 1981년 국가중요문화재인 사적 제280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도 한국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곳은 1907년 일본 제일은행이 사용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했다. 1909년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인 (구)한국은행 건물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나 국권 침탈과 함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구)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었고 1912년 건물이 완공된 뒤에는 조선은행 본점 건물로 이용되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르네상스 양식 석조건물로 실용성과 견고함을 강조하였다. 외관상 형태는 위에서 내려다볼 경우 ‘井(정)’자 모양이고, 정면에서 볼 경우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외벽은 화강암으로 마감하였다. 건물 지하에는 대형금고가 있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기도 했다.
한국은행 건물이라는 본래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1950년 6월 12일이었다. 한국은행이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으로 창립되면서 한국은행 본점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한국전쟁 와중에 내부가 거의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1958년 복구되었다.
1987년 이 건물 뒤편에 한국은행 신관(현 본관)이 준공되면서 원형복권 공사에 착수했다. 2001년 한국은행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화폐박물관으로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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