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ESG 공시 새 판 짠다…'보고서'보다 '데이터'가 투자 좌우
금융사들 국제 기준 맞춘 공시 경쟁 본격화
기후·금융배출량 공개 확대…표준화·외부 검증 과제
ESG 의무화 앞두고 공시 질 높이기 속도
박선영 기자
suny8000@megaeconomy.co.kr | 2026-08-05 17:03:24
[메가경제=박선영 기자] 올해 금융권이 공개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의 중심이 '보고서를 발간했는지'에서 '어떤 데이터를 얼마나 신뢰성 있게 공개했는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사회공헌 활동과 친환경 캠페인을 소개하는 데 머물렀던 보고서는 이제 기후 리스크와 금융배출량, 자연자본, 공급망 관리 등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보여주는 정량 정보를 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다만 회사마다 공시 기준과 산정 방식이 달라 투자자가 기업 간 ESG 경쟁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어렵다는 점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정부가 2028년부터 ESG 공시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기로 하면서 금융권도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앞으로 ESG 보고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소개하는 자료를 넘어 투자자가 기업의 장기 경쟁력과 리스크를 판단하는 핵심 투자 정보로 활용될 전망이다.
◊ 정부 정책이 바꾼 ESG 공시
정부는 최근 관계부처 합동으로 '지속가능성(ESG) 공시 제도화 방안'을 발표하며 공시 대상과 적용 일정, 공시 방식 등을 구체화했다.
정부 계획에 따르면 2028년 연결자산총액 10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부터 ESG 공시를 의무화하고, 2029년에는 5조원 이상 기업으로 대상을 확대한다. 이후 2028~2029년 운영 결과를 평가해 2030년부터 2조원 이상 기업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할 예정이다.
ESG 정보는 사업보고서에 포함해 공시하며, 공시 데이터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제3자 인증도 단계적으로 도입한다. 공급망 배출량인 스코프3(Scope3)는 기업 부담을 고려해 일정 기간 유예하고 ESG 컨설팅과 공급망 데이터 플랫폼 구축 등 지원책도 병행할 계획이다.
이 같은 제도 변화에 맞춰 금융회사들도 지속가능경영보고서의 내용과 형식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 은행권, ESG를 '금융 경쟁력'으로
은행권에서는 ESG를 사회공헌이 아닌 금융 본업과 연결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신한은행은 금융 서비스와 ESG 전략을 연계하고 기존 보고서를 통합해 인공지능(AI)이 활용하기 쉬운 공시 체계를 구축했다. 개인정보 보호와 녹색·전환금융, 기후변화 대응 등을 핵심 의제로 선정하고 ESG 성과를 정량 데이터 중심으로 공개했다.
은행권은 ESG를 여신과 투자, 금융상품, 금융소비자 보호 등 본업 경쟁력과 연결하며 지속가능경영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 증권업계는 '금융배출량' 경쟁
증권업계는 기후 리스크와 금융배출량 공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금융배출량은 금융회사가 직접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아니라 대출과 투자 등을 통해 자금을 공급한 기업과 사업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의미한다. 금융회사의 기후 리스크를 평가하는 핵심 지표로 활용되면서 ESG 공시에서도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현대차증권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해 금융배출량을 처음 공개하고 녹색금융협의체(NGFS) 시나리오를 활용해 2050년까지의 기후 리스크를 분석했다.
SK증권은 국제회계기준재단(IFRS)의 기후 공시 기준(IFRS S2)과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 자연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NFD) 권고안을 반영해 기후와 자연자본 관리 체계를 구체화했다. 금융배출량과 생물다양성 정보까지 공시 범위를 확대하고 외부 검증도 완료했다.
KB증권은 KSSB 기준을 반영해 공시 체계를 재구성하고 ESG 데이터북을 통해 자연자본 리스크와 인권영향평가 결과 등 정량 정보를 확대했다.
증권업계에서는 ESG 경쟁이 단순히 보고서를 발간하는 수준을 넘어 기후 리스크와 금융배출량을 얼마나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공개하느냐로 옮겨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보험·카드도 ESG를 성장 전략으로
보험과 카드업계도 ESG를 장기 성장 전략과 연결하고 있다.
미래에셋생명은 AI 기반 디지털 전환과 건강보험·연금 중심 자산관리, 자산·부채관리(ALM) 체계 등을 ESG 전략과 함께 제시했다.
KB국민카드는 기업이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외부 환경 변화가 기업 재무에 미치는 영향까지 함께 분석하는 '이중 중대성(Double Materiality)' 평가를 도입해 기후위기 대응과 금융소비자 보호, 정보보호 등을 핵심 이슈로 제시했다.
◊ 자산운용사는 ESG를 투자 원칙으로
자산운용업계도 ESG를 투자 의사결정의 핵심 기준으로 반영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이지스자산운용은 ESG를 투자와 경영 전반에 통합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했다. 부동산과 인프라 자산을 운용하는 업계에서는 기후변화와 에너지 효율, 탄소배출 관리가 자산 가치와 직결되는 만큼 ESG 정보 공개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 투자자는 공시 내용 질 살펴야
전문가들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볼 때 발간 여부보다 공시 내용의 질을 살펴야 한다고 조언한다.
대표적으로 ▲기후 리스크 관리 체계, ▲금융배출량 공개 여부, ▲자연자본 관리, ▲공급망 관리, ▲정량 데이터 수준, ▲외부 검증 여부, ▲한국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와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기준 반영 여부 등이 기업의 장기 경쟁력을 판단하는 핵심 요소로 꼽힌다.
글로벌 기관투자가들도 선언적인 목표보다 데이터의 객관성과 비교 가능성, 재무적 영향을 더욱 중요하게 평가하는 추세다.
◊ 같은 숫자도 계산법 제각각…표준화는 숙제
ESG 공시가 빠르게 고도화되고 있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가장 큰 숙제는 기업마다 다른 공시 기준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다. 현재 금융권은 KSSB와 ISSB 기준을 반영해 공시 체계를 고도화하고 있지만 금융배출량과 자연자본, 스코프3 등 핵심 지표의 산정 방식과 공시 범위는 회사마다 차이가 있다. 같은 항목이라도 계산 방식이 다르면 투자자가 기업 간 ESG 수준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어렵다.
공시 데이터의 신뢰성을 높이는 일도 과제로 꼽힌다. 일부 금융회사는 국제 기준에 따라 외부 검증을 받고 있지만 아직 업계 전반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ESG 공시가 의무화되면 단순히 정보를 공개하는 수준을 넘어 데이터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입증하는 것이 기업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들의 부담도 적지 않다. 기후와 공급망 데이터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시스템 구축, 외부 검증, 내부 통제 체계 마련 등에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중소형 금융회사일수록 인력과 비용 부담이 더 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ESG 공시는 이제 사회공헌 활동을 소개하는 보고서를 넘어 기업의 장기 경쟁력과 리스크 관리 역량을 보여주는 투자 정보로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공개했느냐보다 얼마나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같은 기준으로 제시하느냐가 기업가치와 투자 판단을 좌우하는 핵심 경쟁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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