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ETF 투자 1년 새 27조 7000억 증가…증권사 ‘가입 후 관리’ 경쟁
자산배분·리밸런싱부터 성과관리까지…장기 운용 지원 역량 부상
2차 베이비부머 은퇴 앞두고 수령 전략 주목…“다음 승부처는 인출”
박선영 기자
suny8000@megaeconomy.co.kr | 2026-08-12 16:28:06
[메가경제=박선영 기자] 퇴직연금계좌에서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한 자금이 1년 새 27조 7000억 원 증가하면서 증권사들의 연금 경쟁도 달라지고 있다. 계좌를 개설하고 적립금을 끌어오는 데서 나아가 가입자가 노후자금을 어떻게 굴릴지 돕는 자산배분과 리밸런싱, 성과관리 등 가입 이후 관리로 경쟁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2차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화하면서 앞으로는 자산을 불리는 ‘운용’을 넘어 은퇴 후 ‘어떻게 나눠 받을지’를 설계하는 인출 서비스도 새로운 승부처로 떠오르고 있다.
1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증권사들은 최근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과 개인형퇴직연금(IRP) 고객을 대상으로 ETF 투자 지원과 포트폴리오 제안, 자산배분·리밸런싱 등 가입 이후 자산관리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실제 상담 현장에서도 가입자의 관심사는 상품 가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연금 고객들이 주로 묻는 내용은 저조한 수익률이나 장기간 현금성 자산으로 남아 있는 적립금 관리, 은퇴를 앞둔 자산배분 조정, 연금을 유리하게 받을 수 있는 방법 등이다. NH투자증권은 이들 고객에게 디지털 안내와 전화 상담, 포트폴리오 제안 등을 제공하고 있다.
증권사들이 연금 고객을 계좌 개설 단계에서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십 년에 걸친 운용과 은퇴 이후 수령까지 연결하려는 배경이다.
◊ 21조→48조 7000억 원…퇴직연금 ETF 투자 2배 넘게 증가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퇴직연금 투자 방식의 빠른 변화가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지난 5월 발표한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퇴직연금계좌의 ETF 투자금액은 48조 7000억 원으로 2024년 말 21조 원보다 27조 7000억 원 증가했다. 증가율은 131.9%에 달한다.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도 지난해 말 501조 4000억 원으로 전년 말 431조 7000억 원보다 16.8% 늘었다. 펀드와 ETF 등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된 적립금은 123조 3000억 원으로 전체의 24.6%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ETF 투자금액은 실적배당형 적립금의 약 40% 수준까지 올라왔다.
과거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상품 중심이었던 퇴직연금에서 가입자가 직접 투자상품을 골라 운용하는 영역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연금을 직접 운용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NH투자증권은 최근 20·30대 고객의 연금과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투자 성향 측면에서는 ETF 직접투자를 원하는 고객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증권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회사 측에 따르면 DC·IRP 가입자와 ETF 직접 매매가 함께 늘면서 고객의 투자자산 비중은 70% 수준까지 높아졌다.
대신증권 관계자는 “연금과 ISA를 단순한 절세 상품이 아닌 고객의 생애주기에 맞춘 종합 자산관리의 핵심 축으로 생각한다”며 “노동 중심에서 자본 중심으로 자산 형성 방식이 변화하는 흐름에 맞춰 고객의 장기적인 투자 여정을 지원하는 자산관리(WM)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 ETF 투자 급증했지만…자산배분·리밸런싱은 ‘숙제’
ETF 투자 확대가 곧 안정적인 노후자금 운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DC는 가입자가 직접 적립금을 운용하고 그 성과에 따라 향후 받을 퇴직급여가 달라진다. IRP 역시 상품 선택과 운용 결과가 노후자산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 수익률이 높은 ETF나 특정 자산에 노후자금이 집중되면 시장 조정기에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반대로 운용되지 않은 자금이 현금성 자산에 장기간 머물 경우 물가 상승 등을 고려한 실질적인 노후자산 증식에 불리할 수 있다.
결국 연금계좌에서는 ‘무엇을 살 수 있느냐’ 못지않게 가입자의 연령과 은퇴 시점, 위험 감수 수준에 맞춰 자산을 배분하고 주기적으로 포트폴리오를 점검하는 과정이 중요해지고 있다.
삼성증권은 퇴직연금 시장에서 플랫폼의 편의성 자체보다 이를 통해 가입자가 일관되고 안정적으로 자산을 운용하도록 지원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플랫폼 편의성은 기본”이라며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서비스가 퇴직연금 고객의 계좌 운용에 일관성과 안정성을 제공할 수 있는지, 이를 지원할 사업자의 역량이 충분한지가 퇴직연금 시장에서 우위를 갖는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증권은 ETF 수익률과 거래량, 투자자 관심도 등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연금 ETF 랭킹’을 제공한다. ‘연금ETF모으기’를 통해서는 여러 ETF에 자금을 나누는 자산 분산과 정기 매수를 통한 시간 분산을 지원한다.
NH투자증권도 장기 자산배분과 위험관리 역량에 무게를 두고 있다. 디지털 서비스를 통해 일상적인 투자 정보를 제공하되 중요한 투자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는 전문가 상담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고객의 가입·운용·점검·연금수령에 이르는 긴 여정을 얼마나 쉽고 일관된 경험으로 연결하느냐가 핵심”이라며 “장기 자산배분과 위험관리 역량, 디지털 편리함과 사람의 전문성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체계가 뒷받침돼야 진짜 경쟁력이 된다”고 말했다.
회사는 자체운용형과 외부 전문업체 연계형을 함께 제공하는 ‘2-Track’ 로보어드바이저를 운영하고 있다. 자체운용형은 32개 전략을 갖췄으며 디폴트옵션도 방어·중립·공격형으로 나눠 10개 상품을 제공한다. 연금자산관리센터와 전문 프라이빗뱅커(PB)를 통한 대면 컨설팅도 병행한다.
대신증권은 전체 영업점에 연금 전문가인 ‘생애주기컨설턴트’를 선발했다. 리서치센터와 협업해 매월 연령별 맞춤형 포트폴리오를 제시하는 ‘자산배분가이드’를 운영하고 고배당·고금리 상품을 활용한 장기 운용 전략도 안내한다.
증권사별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방향은 비슷하다. 상품을 많이 갖추고 거래를 편리하게 만드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가입자가 장기간 연금자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 현금으로 놔둔 연금…디폴트옵션만으로 충분할까
특히 증권사들이 풀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는 연금계좌를 갖고도 적립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지 않는 가입자를 어떻게 관리할지다.
NH투자증권이 실제 상담 현장에서 수익률이 낮거나 현금성 자산을 장기간 보유한 고객의 자산관리 문의를 주요 상담 수요로 꼽은 것도 이와 맞닿아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다. DC·IRP 가입자가 일정 기간 운용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지정한 방법에 따라 적립금을 운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하지만 디폴트옵션 역시 가입 이후 관리의 종착점이라기보다는 운용을 시작하도록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삼성증권은 디폴트옵션 상품을 선정할 때 단순 절대수익률보다 위험을 감안한 장기 운용 성과에 무게를 둔다. 변동성을 고려한 수익성을 보여주는 샤프지수와 고점 대비 최대 하락폭(MDD) 등 위험관리 지표도 함께 살펴본다.
상품 선정 이후에는 당초 운용 철학이 유지되고 있는지, 자산배분 전략이 시장 상황과 지나치게 괴리되지 않았는지 등을 지속적으로 점검한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디폴트옵션은 고객의 적립금이 현금성 자산으로 방치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보완책이자 ‘출발점’일 뿐 최종 목적지가 돼서는 안 된다”며 “고객이 자신의 생애주기와 투자 성향에 맞춰 능동적으로 자산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삼성증권은 고객이 자산 현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맞춤형 성과 리포트를 제공하고 리밸런싱이 필요한 시점에는 관련 가이드도 제공하고 있다.
◊ 장기 수익률도 경쟁력
연금은 운용 기간이 수십 년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 특정 연도의 수익률보다 장기간 성과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했는지도 사업자의 경쟁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NH투자증권은 리서치 애널리스트와 상품·포트폴리오 전문가가 함께 투자상품을 선정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회사 측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IRP 10년 수익률은 연 10.35%로 전체 퇴직연금사업자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단기 성과를 좇기보다 리서치 애널리스트와 상품·포트폴리오 전문가들이 함께 상품을 선정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전문성이 꾸준히 쌓인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장기 수익률 역시 사업자를 고르는 여러 기준 가운데 하나다. 상품 구성이나 가입자의 투자 성향 등에 따라 성과가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위험관리와 비용, 상담 서비스 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 83.5%는 일시금 선택…이제는 ‘잘 받는 법’도 경쟁
가입 이후 관리의 범위는 투자 단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은퇴가 시작되면 쌓아둔 연금자산을 어떤 방식으로 꺼내 쓸 것인지가 새로운 문제가 된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급을 시작한 60만 1000명 가운데 연금 형태로 받은 사람은 9만 9000명으로 16.5%에 그쳤다. 나머지 50만 2000명(83.5%)은 일시금을 선택했다.
연금 형태를 선택한 경우에도 수령 기간은 길지 않았다. 연금 수급자의 약 82%가 10년 이하 수령 방식을 택했다. 5년 이하는 17.5%, 5~10년은 64.3%였고 20년을 초과해 받는 비중은 2.3%에 그쳤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이를 은퇴 이후 장기간 노후소득으로 활용하는 단계는 아직 상대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1964~1974년생인 2차 베이비부머가 향후 10년간 본격적인 은퇴 시기를 맞는다. 연금시장의 무게중심도 적립금을 모으고 굴리는 단계에서 실제 생활비로 사용하는 단계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대신증권이 연금 플랫폼의 다음 핵심 키워드로 ‘인출’을 꼽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은퇴 전에는 어떤 상품으로 얼마의 수익을 낼지가 중요하지만 연금 개시 이후에는 매달 얼마를 받을지, 어떤 계좌에서 어떤 순서로 인출할지, 남은 자산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지가 새로운 고민이 된다. 세금과 건강보험료 부담까지 고려하면 가입자의 자산과 소득 구조에 맞는 수령 전략도 중요해진다.
대신증권 관계자는 “업계 전반이 그동안 모으는 단계에 집중해 왔다면 이제 연금개시를 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며 “‘얼마나 잘 모아줬는가’를 넘어 ‘얼마나 편하게, 얼마나 오래 받게 해주는가’가 향후 연금시장의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연금을 수령하는 입장이 되면 매달 얼마를 어떤 계좌에서 어떤 순서로 받아야 세금과 건강보험료 부담이 줄어드는지, 최소한의 자금을 연금으로 받으면서 원금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 등 ‘인출’ 부분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NH투자증권에서도 연금수령 방식은 실제 상담 현장에서 나타나는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자산을 불리는 것뿐 아니라 은퇴 이후 필요한 현금흐름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까지 연금 서비스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는 셈이다.
◊ 적립금 규모보다 ‘몇 년간 잘 굴렸나’ 따져야
연금사업자의 경쟁 방식이 달라지면서 가입자가 금융회사를 고르는 기준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NH투자증권은 장기 수익률과 위험관리 역량, 상품 다양성, 디지털 편의성, 전문가 상담 연계 등을 주요 선택 기준으로 꼽았다. 노후자금인 만큼 단기 성과보다 꾸준한 성과와 손실 관리가 우선이고, 필요할 때 전문가에게 상담받을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대신증권 역시 적립금 규모나 특정 연도의 높은 수익률보다 장기간의 운용 성과와 비용, 연금 개시 이후 제공되는 서비스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신증권 관계자는 “적립금 규모가 운용 역량의 증거는 아니며 단기 수익률은 그해 시장 상황만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며 “장기 수익률을 상위권으로 몇 년간 유지했는지, 관리 수수료 등 비용이 얼마나 높은지, 연금 개시 단계에서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퇴직연금의 역할을 적립금 축적에서 안정적인 노후소득 확보까지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보 제공을 강화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은 올해 하반기 퇴직연금 사업자 등과 함께 적립부터 인출까지 다양한 사례와 운용 정보를 담은 ‘퇴직연금 가이드북’을 발간할 예정이다.
퇴직연금 ETF 투자금액이 1년 사이 27조 7000억 원 증가하면서 연금시장의 과제도 달라지고 있다. 투자 선택지가 늘어난 만큼 가입자의 자산배분과 위험관리, 금융회사의 사후관리 역량이 동시에 중요해졌다.
2차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이어지면 경쟁은 연금을 잘 굴리는 데서 잘 나눠 받도록 돕는 단계로 한 번 더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계좌 확보에서 시작된 증권사의 연금 경쟁이 가입자의 자산 형성부터 은퇴 이후까지 이어지는 장기 자산관리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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