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로 가격 올렸다”…제지사 6곳, 4년 담합에 3383억 철퇴
들킬까봐 공중전화·가명까지 동원…한국제지·홍원제지 검찰 고발
제지업계 기준 최대 담합사건
주영래 기자
leon77j@naver.com | 2026-04-23 14:53:03
[메가경제=주영래 기자] 교과서와 단행본 등에 쓰이는 인쇄용지 가격을 약 4년간 짜고 올린 제지업계 담합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됐다. 공정위는 시장의 대부분을 점유한 6개 인쇄용지 제조사가 총 7차례 가격 인상을 공모한 사실을 확인하고, 시정명령과 함께 총 3383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3일 무림에스피, 무림페이퍼, 무림피앤피, 한국제지, 한솔제지, 홍원제지 등 6개 인쇄용지 제조사의 가격 담합 행위를 적발하고 시정명령과 과징금 총 3383억 원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한국제지와 홍원제지 2개 법인은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이번 과징금은 공정위가 처리한 담합 사건 가운데 역대 5번째로 큰 규모이자, 제지업계 사건 기준으로는 최대 규모다.
공정위에 따르면 이들 업체 임직원은 2021년 2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약 3년 10개월 동안 정기·비정기 회합을 최소 60차례 이상 갖고 인쇄용지 전 제품의 판매가격 인상을 공모했다. 이들은 기준가격 직접 인상과 할인율 축소를 번갈아 사용하는 방식으로 총 7차례 가격 인상에 합의했고, 이를 모두 실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1차 합의는 2021년 3월 할인율 15%포인트 축소 방식으로 이뤄졌고, 이후 2022년 5월에는 기준가격을 15% 올리는 등 가격 인상 조치가 이어졌다. 공정위는 7차례 합의가 단 한 차례의 이탈 없이 실행됐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인쇄용지 평균 판매가격은 담합 시작 시점인 2021년 2월 톤당 84만1000원에서 담합 종료 시점인 2024년 12월 143만9000원으로 71% 상승했다. 해당 6개사의 시장점유율은 수입 물량을 제외하면 95%, 수입 물량을 포함해도 81%에 달해 사실상 시장 전반에 가격 인상 효과가 미친 것으로 공정위는 보고 있다.
공정위는 인쇄업체와 출판사 등이 원가 부담을 떠안으면서 교과서와 도서 구입비 등 소비자 생활비 부담 확대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특히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경제 전반이 어려운 시기에 원가 상승 부담을 거래처에 전가하며 부당이득을 극대화한 점을 중하게 봤다고 설명했다.
담합 과정에서는 치밀한 은폐 정황도 드러났다. 임직원들은 본인 명의 휴대전화 대신 공중전화나 식당 전화, 타 부서 직원 휴대전화를 번갈아 사용했고, 경쟁사 연락처는 휴대전화에 저장하지 않은 채 별도 종이에 이니셜이나 가명으로만 적어둔 것으로 조사됐다. 가격 인상 통보 순서를 두고 이견이 있을 경우 동전이나 주사위를 던져 순서를 정한 정황도 확인됐다.
공정위는 이번 사건에서 단순 금지명령을 넘어 ‘독자적 가격재결정 명령’도 함께 부과했다. 7차 합의 이후에도 기준가격이 그대로 유지돼 담합 영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6개 제지사는 담합 이전 경쟁 수준을 반영해 가격을 스스로 다시 산정해야 하며, 향후 3년간 반기마다 가격 변경 내역을 공정위에 보고해야 한다. 공정위가 가격재결정 명령을 내린 것은 2006년 밀가루 담합 사건 이후 두 번째다.
업체별 과징금은 한솔제지 1426억 원, 무림피앤피 920억 원, 한국제지 491억 원, 무림페이퍼 458억 원, 무림에스피 347억 원, 홍원제지 85억 원이다.
공정위는 인쇄용지 제조업이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한 구조여서 신규 진입이 어렵고, 이번에 적발된 사업자들이 과거에도 반복적으로 법 위반 전력이 있었다는 점을 제재 수위에 반영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중동전쟁 여파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인쇄·출판업계와 중소 유통업체의 부담을 완화하고, 국민 생활비 부담을 키우는 담합의 고리를 끊겠다”고 밝혔다. 이어 밀가루, 전분당, 계란 등 식료품 분야 담합 사건 심의도 신속히 진행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 메가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